효녀 심청과 '노인의 날' - 박효종
	2004-10-04
효녀 심청과 '노인의 날' 우리 사회가 고령화사회에 진입하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어느 새 총인구의 10%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노인인구가 된 것이다. 이런 속도라면 노인들이 총인구의 20%에 육박하는 초고령사회도 머지않아 도래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이미 일부 농촌지역은 고령사회에 진입한 상황이다. 노인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역시 가을이고 벌거벗은 나목이다. 그래서 소동파도 푸른 청춘(靑春)에 비해 소추(素秋)라고 하였나 보다. “죽음을 생각하라”는 ‘메멘토모리(memento mori)’도 빼놓을 수 없고, 실버타운이나 탑골공원도 노인의 상징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이런 상징들이 한가로운 일반론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나라를 휩쓸고 있는 세대갈등 때문일 것이다. 지난 대선을 계기로 2030세대와 6070세대는 가르침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 갈등의 관계가 되었다. 세대갈등의 대표적인 것은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유장유서(幼長有序)’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나이많은 사람들의 말이나 권위에 나이적은 사람들이 승복하던 ‘장유유서’는 어느덧 나이적은 사람들이 발언권을 행사하고 나이많은 사람은 무력감을 곱씹는 ‘유장유서’로 변한 것이다. ‘국가원로’나 ‘사회원로’까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태에 대해 무엇을 탓할 것인가. 삼국지가 뒤집혀 유비는 덕장이나 성군에서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쪼다’로 추락하고 간웅으로 묘사되었던 조조는 탁월한 지략가이자 정치지도자로 새롭게 부활했다. 흥부전의 주인공인 흥부와 놀부도 완전히 ‘거꾸로 서기’를 했다. 착하고 가난한 동생 흥부는 무능하고 게으른 자, 대책없이 애들을 많이 낳은 자로 치부되고 심술많은 형 놀부는 재산증식의 능력을 발휘한 뛰어난 펀드매니저로 올라섰다. 개미와 배짱이도 운명이 바뀌어 개미의 성실하고 부지런함은 ‘일중독자’의 무능함이 되고 쾌락주의자 배짱이의 느긋한 태도는 ‘웰빙족’의 모델이 되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바뀌고 거꾸로 되었는데, 세대의 질서만 푸른 소나무처럼 살아남으란 법이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국내최고령자가 여자 109세, 남자 105세로 밝혀졌다는 사실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또 부지런히 일하고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으며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라는 보도에 대해 시큰둥하게 느낄 노인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노인들도 자존감을 지닌 존재로서 존경과 대접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노인헌장’이 발표되었다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우리사회에서 노인에 대한 최고의 대접은 ‘효’였다. 효란 무엇일까. 아침에 들어와 부모에게 문안을 드리고 3년상을 하며 말로 ‘어르신’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효가 아니다. 자녀가 부모에 대하여 헌신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 효지만, 어렸을 때의 효는 덕목이 아니다. 부모가 먹여주고 입혀주는데 불효할 자녀가 어디 있는가. 어머니아버지날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부모가 나이가 들어 강자나 현자의 면모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고 병약자나 컴퓨터도 못하는 컴맹이 되었을 때도 변함없는 존경과 헌신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효다. 효(孝)의 글자풀이도 아들이 어버이를 업어드리는 형국이다. 오늘날 젊은 세대에게 부자되기보다 효녀효자가 되라는 덕담을 할 수 있을까. ‘호랑이가 담배피던 시절’에서 ‘호랑이가 복제되는 시절’로 변한 지금의 상황에서 효녀 심청이를 들먹이는 것은 심청이를 살려준 용왕을 들먹이는 것처럼 부질없는 일일 터이다. ‘효녀심청이’보다 ‘커리어우먼 심청이’가 더 멋있지 않을까. 하지만 경계해야 할 일이 있다. 심봉사를 위해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바다에 던진 심청이는 효녀이지, 여성박해의 피해자이며 자아실현을 하지 못한 바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정치학 / 시민회의 공동대표) 출처 - 세계일보 2004. 10. 4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