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 들먹이며 싸우는 사회 - 류동길
	2004-09-24
조상 들먹이며 싸우는 사회 심한 불경기 속에서도 한가위 명절은 온다. 흩어져 살았어도 가족들이 모여 서로가 한 핏줄임을 확인하고 조상을 기리는 좋은 기회다. 누구에게나 가족은 소중하다. 그러기에 조상 또한 귀하고 소중하다. 어느 국회의원이 독립군 김학규 장군의 손녀이며 독립운동가의 딸이라고 주장한 것이 문제가 됐다. 그래서 그의 가계(家系)가 들춰지고 복잡한 가족사가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그 주장의 진위(眞僞)에 대한 증언도 엇갈려 있고 김학규 장군이 의성 김씨인지, 안동 김씨인지를 두고서도 말이 많다. 1967년 9월 20일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김학규 장군이 지하에서 얼마나 분통을 터뜨릴까. 그의 본관(本貫)이 어디든 그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독립군이었다. 우리는 어느 특정인의 가계나 족보에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 국회의원은 선거에서 그런 주장을 했고, 그런 가족사를 내세워 주요 지도자들이 친일파라면서 과거사 청산에 앞장서왔기 때문에 그의 가족사 진위가 정치적·사회적 문제가 돼 버리고 말았다. 훌륭한 분과 가깝다는 걸 주위에 알려 자기 스스로도 그와 비슷한 반열에 올려놓고 싶은 동일시(identification)심리는 보통사람에게 다 있다. 하지만 이 문제가 그런 심리의 발로라고 치부하고 넘어갈 수 없게 돼 버린 것은 안타깝다. 독립군 손녀이며 독립운동가의 딸인지 여부를 따지는 건 마치 수입 상품의 원산지를 따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중국에서 들여온 농산물이나 외국산 쇠고기가 국산으로 둔갑하는 일이 얼마나 잦은가. 훌륭한 조상이 있다는 건 가문의 영광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조상 이름에 기대어 이익을 보려는 건 일종의 무임승차 행위다. 조상이 독립군이 아니었다고 해서 할 일 못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진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 가운데 그들 조상이 그러했듯이 의연하게 살고 있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가. 과거를 부정하는 건 어렵지 않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고 했듯이 힘있는 사람은 자기 나름의 잣대로 역사를 평가할 수 있다. 잘못된 과거는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떳떳한 조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교육 경제 외교 국방 등을 소홀히해서 나라가 흔들린다면 후손들에게 “왜 그랬느냐, 누가 그랬느냐”는 지탄을 받고 우리들이 청산 대상으로 심판받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친일 규명 등 역사 청산은 의도하든 안 하든 죽은 사람을 심판해서 멀쩡한 산 사람에게 상처를 줄 가능성이 짙다. 부친의 행적 때문에 얼마 전 여당 대표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는가. 결국 연좌죄의 덫에 걸린 것이다. 감정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데 이성(理性)이라는 브레이크가 이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역사 청산에서 필요한 것은 그 당시 세계 정세는 어떠했으며, 무엇을 잘못해서 나라를 빼앗겼는지를 따지는 머리와 눈이다. 그래야 과거 잘못을 거울삼아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은 문화혁명으로 중국을 수렁에 빠뜨렸고 자신을 정치적으로 탄압했던 마오쩌둥(毛澤東)에 대해 과오보다 공로가 크다고 평가했다. 미래 지향적 리더십의 발로다. 그런 리더십이 이어져 오늘의 중국이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조상 잘못의 책임을 물어 사람을 인민재판하지 말자. 조상이 훌륭하다고 자손도 훌륭한 건 아니다. 조상의 빛나는 과거를 내세워 조상 이름 팔 생각 말자. 우리 스스로 자랑스러운 조상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우리 스스로 더 좋은 집안과 사회, 더 좋은 나라 만드는 일을 하자. 그게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책무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이런 다짐이라도 한다면 더욱 뜻 있는 한가위가 되지 않겠는가. 류동길 (숭실대 경제학 명예교수 / 시민회의 회원) 출처 - 문화일보 2004. 9. 24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