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원하면 테러 대비하라 - 박효종
	2004-09-08
평화 원하면 테러 대비하라 비극으로 끝난 러시아 정부의 테러 진압을 많은 사람들은 ‘잔인한 대응’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인명경시사상이 그대로 노정된 결과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러시아의 테러 대응이 미숙했다고 하지만, 테러 대비에 관한 러시아의 축적된 노하우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러시아는 ‘빅 브러더 시스템’이 가동되었을 만큼 완벽에 가까운 통제력을 갖춘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이어받은 나라다. 또 체첸반군과 오랜 기간 ‘테러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라서 경각심이 낮았다고도 할 수 없다. 대테러 보안에 관한 한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가 이번과 같은 재앙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은 예상치 못한 미국의 9·11사태처럼 설마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테러가 일어나겠는가 하는 안이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준칙이 있다. 로마시대 이후로 국제정치에서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준칙이다. 지금이야말로 “평화를 원한다면 테러에 대비하라”는 준칙을 만들어야 할 때가 아닐까. 냉전체제가 붕괴하면서 핵전쟁에 관한 위협과 공포는 사라졌지만 평화는 찾아오지 못했다. 그 이후 새로운 유형의 문명충돌이 일어나면서, ‘얼굴없는 전쟁’,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한국도 테러 무풍지대가 아니다. 우리도 이라크에 군대를 보낸 처지가 아닌가. 우리의 테러대비책은 어떤가. 과거 수차 북한으로부터 무장침투를 겪으면서 해안가까지 경계하는 등 나름대로 엄격한 보안체제를 구축해 놓았다. 최근 남북정상회담 등 나름대로 해빙 무드가 조성되면서 그러한 보안체제는 풀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북한만이 우리 안전의 위협이고 테러는 ‘강 건너 불’인 것처럼 말이다. 대구지하철 참사를 겪고 난 다음 지하철 화재 대비훈련을 시작한 것이 고작이다. 하나 그것조차도 ‘반짝’ 대응책에 그치고 말았다. 가끔 특수부대요원들이 벌이는 테러 진압작전 훈련 모습을 TV를 통해 보는 것 말고 다른 것이 있는가. 이처럼 테러사태에 태평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지부조화 이론가들이 말하듯, 우리는 테러가 없는 안전한 곳에서 살고 싶다는 ‘희망사항’으로 일관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은 고층아파트 공사를 하는 인부가 안전모를 쓰지 않는 경우와 유사하다. 언론에서는 이런 현상을 ‘안전불감증’이라고 비판하지만, 실은 자기자신이 위험한 곳에서 일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스스로에게 주입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지금 한국사회야말로 테러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다. 이라크 테러조직에 의해 김선일씨가 무참히 살해되어 충격과 분노에 휩싸인 것이 엊그제인데, 벌써 까맣게 잊고 있지나 않는지. 테러가 없을 것이라는 희망사항보다는 테러 발생이 실제상황이라는 관점에서 대비태세를 서둘러야 한다. 입국보안 기준을 강화하여 입국자에게 이름과 숙박지를 적은 확인서를 제출토록 하는 것은 어떨까. 공항과 항만 보안 기준도 강화해야 한다. 하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테러리스트는 언제나 우리의 허를 찌르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의 쌍둥이 빌딩 테러에서 비행기를 납치하는 것이 아니라 비행기 자체를 무기로 사용하겠다는 발상처럼 말이다. 따라서 다중시설에 대한 보안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혹은 상수원이나 철도 등에 보안은 어떻게 되는지 세밀히 점검하고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 유치원이나 중고등학교에도 테러 방어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재앙이 일어난 다음 비로소 허둥지둥 대비책을 강구하는 것은 회한만을 가져올 뿐이다. 미국이나 러시아에서 대규모 테러참사가 일어나리라고 예상한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우리는 러시아 사태를 교훈삼아 테러 방어 시스템 구축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정치학 / 시민회의 공동대표) 출처 - 세계일보 2004. 9. 8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