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질총리제’정착의 조건 - 박효종
	2004-08-11
‘실질총리제’정착의 조건 노무현 대통령이 10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역할 분담의 틀을 제시했다. 내용을 보면, 대통령은 장기적 국가전략과제 및 주요혁신과제를 추진하는 데 집중하고, 국무총리는 일상적인 국정 운영을 총괄토록 하겠다는 것이다. 아직은 이러한 역할분담론이 총론 수준의 언급에 불과하기 때문에 총리 역할을 강화하는 쪽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란 힘들 것 같다. 청와대도 ‘책임총리론’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관심의 초점은 역할 분담이 책임총리제의 단초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이고 정치란 ‘가능성의 예술’이기 때문에 이런 저런 가능성을 시험하다 보면 의도와는 달리 새로운 제도가 출현할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프랑스도 책임총리제를 처음부터 명백한 의도를 갖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과 권력을 분점하는 책임총리제가 헌법에 규정돼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승리함으로써 여야의 역학관계가 변함에 따라 정치적 타협이 이뤄졌고, 그 결과 책임총리가 탄생했던 것이다. 그 동안 한국에서 ‘대독총리’나 ‘의전총리’의 범주를 넘어서는 실질총리의 필요성은 꾸준히 거론돼 왔다. 정당성의 논리라면 국정의 효율성인데, 지금도 효율적 국정 운영 시스템 확립에 무게가 두어진 것 같다. 문제는 역할 분담의 실현 가능성이다. 대통령으로서는 국정 업무 분담의 차원에서 총리에게 일상적인 국정을 맡길 것을 분명히했지만, 법과 제도의 정비까지는 생각지 않는 듯하다. 물론 이 정도의 역할 분담만 실현돼도 기존의 총리상과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권한 분배의 구체화, 보좌기구 정비, 권한 행사 통로 구축, 권한 행사의 실효성 확보 등 일련의 제도적 장치없이 역할 분담을 한다면, 실질총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특히, 제도적인 역할 분담이 아니라 편의적인 역할 분담만으로는 리더십의 효율성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편의적인 역할 분담이 총리 역할 강화의 한 모습일 수는 있겠지만, 일련의 제도와 규칙들에 의하여 총리 권한이 명실상부하게 뒷받침되지 않는 한, 새로운 위상의 실질총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에는 상당한 의문이 있다. 지금의 역할 분담은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의 결과다. 현 제도 아래에서 대통령의 결단이 역할 분담 활성화의 필요 조건이라는 점에 대해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대통령의 의사가 역할 분담의 ‘필요조건’은 될 수 있겠지만, ‘충분조건’도 될 수 있을 것인가? 충분조건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대통령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주위 사람들, 특히 장관이나 청와대 비서진들이 총리를 ‘일인지하(一人之下)의 영의정’으로 치부하고 있는 한, 역할 분담이 실효를 거두기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실질총리는 ‘권력 공유’의 관점에서 접근해야지 ‘역할 분담’의 관점에서만 접근하는 것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역할 분담의 논리는 무엇인가? 국정을 개혁적 범주의 의제와 일상적 범주의 의제로 나누고 각기 대통령과 총리의 역할을 부여하는 데서 그 논리가 출발하고 있다. 하지만 개혁적 의제와 일상적 의제의 구분이란 ‘칼로 물베기’처럼 부질없는 일이 아닐까.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과 같은 임의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업무는 중복돼 같이 수행하더라도 ‘실질적 협의’가 이뤄진다면 실질총리의 위상이 정립될 수 있을 터인데, 이것은 권력 공유가 이뤄질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물론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는 법이며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책임총리제가 아닌 역할분담론이 대통령의 뜻에 의해 시작됐지만, 순조롭게 발전하면 제도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것은 정치 발전의 한 모습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앞으로 대통령과 총리의 역할 분담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지 기대를 갖고 지켜볼 것이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정치학 / 시민회의 공동대표) 출처 - 문화일보 2004. 8. 11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