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9/11'과 다큐의 함정 - 조희문
	2004-08-09
'화씨 9/11'과 다큐의 함정 “백번을 들어도 한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말은,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며, 존재하는 것은 진실이라는 믿음을 전제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일반적인 극영화보다 더 감동적이며 세상의 진실을 전해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믿음을 증명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믿음에는, 보여줄 수 있다면 믿도록 만들 수 있다는 위험한 함정도 함께 있다. ‘화씨 9/11’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테러라고 불리는 ‘9·11’ 사건을 계기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테러의 배후로 지목받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과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업적 유착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라크전쟁은 거짓과 선동으로 가득찬 기만이라고까지 주장하는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하지만 정작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진실을 추적하는 위대한 용기와 그 결과로 드러나는 감동이 아니라 미리 설정한 목적에 맞춰 ‘진실’을 이리저리 짜깁기했을 때 어떻게 선동의 수단으로 변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기보다는, 드러난 진실을 필요에 따라 인용함으로써 인민재판의 논고에 스스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9·11테러 당시의 폭발음과 거리의 소음, 사람들의 비명을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이후 미국 사회의 풍경과 이라크전쟁 상황을 보여준다. 그러나 감독의 의도는 9·11테러나 이라크전쟁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부시 대통령이 얼마나 무능하고, 악의적이며 선동적으로 일련의 사태를 끌고 왔는지를 비난하는 것이다. 부시의 대통령 당선이 아예 잘못된 것이라고 우기거나 9·11테러가 일어난 바로 그때, 어느 유치원을 방문하고 있던 부시 대통령이 동화책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보여주고 오사마 빈 라덴 일가와의 사업적 유착까지 언급하는 것은 대통령으로서의 자격 자체를 부정하며 따라서 모든 사태의 책임은 그에게 있다는 것으로 몰아가려는 빌미거리이자 이미지의 나열이다. 영화를 정치선전에 십분 활용한 히틀러 뒤에는 레니 리펜슈탈(1902-2003)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 있었다. 리펜슈탈이 히틀러를 촬영한 영상들은 약간 올려다보는 모습의 바스트 쇼트를 기본 이미지로 삼아 단호하고 확신에 찬 표정과 몸짓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히틀러가 등장하는 장면의 바로 뒤에는 열광하는 군중, 보무 당당하게 행진하는 나치 군대의 모습을 이어 붙인다. 무기력하거나 조급하고 불안한 행동, 연설을 듣는 관중들의 숫자가 적거나 지루해 하는 모습 등은 철저하게 잘라내 버리고 오직 필요한 장면만 선택해서 편집했다. 혼란과 불안에 젖은 독일 국민을 이끌어줄 것이라고 믿었던 히틀러가 오히려 독일국민과 온 세계를 전쟁의 광란 속에 빠뜨렸던 사실과 비교하면 영화를 통해 조작된 히틀러의 이미지가 얼마나 실제와 다른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리펜슈탈이 만든 히틀러의 기록영상은 ‘다큐멘터리는 오직 사실과 진실만을 표현한다’는 막연한 믿음의 함정을 파고들어 ‘보여주기만 한다면 믿게 만들 수 있다’는 전략을 실현한 역사적 사례로 꼽힌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을 의결했을 때 방송들은 반대하는 의원들이 소리치고 눈물 흘리는 모습, 촛불 시위하는 지지자들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반복해서 보여 주었다. 탄핵 의결의 배경, 절차적 정당성, 대통령의 통치행태를 분석하고 따지는 경우는 없었다. 의결에 찬성한 국회의원들이 얼마나 부도덕한지를 강조함으로써 선악의 싸움인 것처럼 몰아갔을 뿐이다. ‘화씨 9/11’은 이미지의 선택과 선동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란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잘 보이는 것일수록 그 속이 어떤 것인지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 들러리를 면하는 세상이다. 조희문 (상명대 영화평론가 교수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문화일보 2004. 8. 7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