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북치는 외교시스템 안된다 - 제성호
	2004-06-28
뒷북치는 외교시스템 안된다 김선일씨의 납치·피살사건에서 우리 정부가 보여준 안이하고 무기력한 대응에 대한 비판여론이 들끓고 있다. 이 같은 여론을 의식한 감사원은 외교안보부처에 대한 감사에 착수했다. 지금까지 정부는 해외에서 우리 국민이 살상되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사후 뒷수습에 급급해했다. 또 말로는 매번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하지만 그런 약속은 언제나 지켜지지 않은 채 유야무야로 끝났다. 현행 외교안보시스템과 ‘펑크 때우기’식의 대응자세로는 앞으로도 제2, 제3의 김선일씨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이번에 실무자 몇 명을 징계하는 선에서 사건을 매듭지으려 해선 안된다. 철저한 진상규명, 확실한 재발방지 대책 마련과 더불어 총체적 부실을 드러낸 우리 외교안보시스템을 대대적으로 수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번 사건에서 문제 삼아야 할 부분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선 주무부처인 외교부는 사건 발생 후 3주일이 지나도록 피랍사실을 알지 못했다. 우리 국민이 그것도 세계적으로 이목이 집중된 뉴스원인 이라크에서 난 사건이다. AP로부터 전화를 받은 외교통상부 직원이 보여준 행태는 직무유기에 가까웠다. 통상 민원인이 해외공관은 물론 외교부 본부에 문의할 때 대꾸하는 그런 고자세다. 사태가 언론에 불거져 외교부가 나섰을 때는 이미 상황종료된 상태였다. 이라크 주둔 미군당국과 정보협조가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뭐니해도 AP통신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은 외교부 직원이 김선일씨 실종 여부에 대해 ‘피랍자가 없다’고 말했을 뿐, 아무런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은 게 가장 문제다. 문의한 사안은 자국민의 안위와 관련된 것이며, 더욱이 조회를 받은 자는 우리가 추가파병을 준비하는 이라크 내 체류자였다. 마땅히 해당 실무자는 즉각 재외국민 영사국과 상부에 통보 내지 보고를 해야 했다. 이후 외교부 본부는 현지 대사관에게 사실조회를 지시하고, 국가정보원·국방부 등에 정보협조를 요청해야 했었다. 결국 실무자의 무성의와 시스템의 불가동이 초동대응 실패와 뒷북치는 외교를 하게 된 주원인이 됐다. AP통신 기자의 문의를 묵살 내지 그냥 지나친 것은 평소 자기 업무와 무관한 사안을 떠맡지 않으려는 고질적인 관료기질과 언론기피적 자세도 작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외교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국가안보와 국민의 안전·번영 확보다. 그럼에도 현재 우리의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자국민 보호가 등한시돼 있다. 재외국민 영사국은 외교부 내에서 서열이 떨어지며 우수한 외교관은 잘 가려 하지 않는다. 북미국과 구주국 등 인기부서에만 가려 하는 게 현재 외교부 관행이다. 고위 외교관료들이 이를 조장한 사례가 많았다. 최근 한 민간컨설팅 업체는 외교부 업무 중 약 60∼70%가 가치 미창출업무이고 조직유연성도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했다. 이번 기회에 외교부는 조직과 업무 전체를 재검토하여 불요불급한 것은 과감히 줄이고 자국민 보호업무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 우리 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중동지역 전문가와 테러전문가를 확충해야 한다. 해외정보수집 및 위기대응 체계를 보강해야 한다. 아울러 유사시 유관부처 직원의 파견 및 지원이 신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조직유연성을 증대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불거질 부처이기주의는 반드시 배격해야 한다. 연간 500만명 이상의 한국인이 이민, 유학, 사업차 방문 등으로 해외에서 활동 중이다. 1700명 정도의 제한된 인력을 가진 외교부만으로 자국민 보호활동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마인드와 시스템을 총체적으로 개혁하고 부처간의 협조체제를 개선할 때 그나마 상황이 나아질 것이다. 정부는 이번의 외교적 망신을 계기로 보다 현실적이고 실효성 있는 자국민 보호정책을 수립·실천해야 한다. 제성호 (중앙대 국제법 교수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세계일보 2004. 6. 28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