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외교’ 당당하게 하라 - 제성호
	2004-06-18
‘탈북자 외교’ 당당하게 하라 6·15공동선언 이후 실시된 수차례의 대북 지원으로 많은 북한 주민이 따뜻한 햇볕을 체험했지만, 유독 탈북자들은 이와 무관하게 지금도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3월부터 북·중 접경지역인 투먼(圖們)의 탈북자 수용소에서 단식농성을 하며 한국행을 요구했던 7인의 탈북자가 강제 북송되는 안타까운 일이 또 발생했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사태가 한·중 양국의 방치로 이뤄진 ‘소극적 살인’과 다름없다고 분노하고 있다. 중국은 이번에도 탈북자들에게 난민 지위를 확인하는 절차를 개시하지 않았다. 이 같은 부작위는 국제인권단체들의 정당한 요구를 거부하는 비인도적 처사일 뿐 아니라, 1951년 난민협약상의 기본적 의무를 중대하게 위반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중국은 탈북자들의 자유의사를 내세워 강제 북송을 정당화하려 한다. 하지만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등 중립적인 제3자의 참여를 불허한 상황에서, 어떻게 객관적이고 공정한 방법으로 자유의사를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인가. 중국의 낮은 인권 존중 태도와 국제법 인식 수준에 실소(失笑)를 금할 수 없다. 또, 중국은 탈북자들이 목숨을 걸고 베트남으로 가려 했던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려는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한국 정부의 무성의한 태도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번 사건에서 정부는 강제 북송은 없을 것이라는 낙관론으로 해당 언론 보도와 인권단체들의 주장을 ‘부인’으로 일관하다가, 나중에는 중국 정부의 북송 사실 통보를 우리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역할만을 했다. 그나마 북송 시기와 경로는 밝히지 않아 만족스럽지 못한 외교 전령사에 지나지 않았다. 정부는 사후약방문 식으로 중국 대사를 초치해 유감과 항의의 뜻을 전달하고, 북한이 탈북자들을 혹독하게 처벌하지 말라는 대북 권고를 해주도록 중국 정부에 부탁했다. 하지만 실효를 거두기 어려운 면피성 조치요 늑장 대처에 불과했다. 이게 ‘조용한 외교’의 전부라면 걱정이 아닐 수 없다. 탈북자 문제에 대한 무관심, 해결 의지와 노력 부족, 외교적 교섭의 무능력 등 총체적 부실을 여실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탈북자 문제는 국내법상으로는 자국민 보호 문제다. 헌법 제3조 영토 조항과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북한주민도 엄연히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간 정부가 이런 입장에 충실하게 헌법 제2조 2항의 재외국민 보호의무를 다했는지, 또 중국에 대해 한국의 직접 당사자성을 조리있게 설득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최근 탈북자를 위한 여권 위조를 처벌하기 어렵다고 판시한 서울남부지법의 판사도 이 점을 통렬하게 지적했다. 조만간 탈북자들이 해외에서 우리 정부를 상대로 자국민 보호의무 불이행에 따른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거나 헌법상 보장된 ‘귀국의 권리’를 실현시켜 주도록 요구하는 집단 민원사태가 발생할 공산이 크다. 이러한 상황에 대비하지 않으면, 적지 않은 사회적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탈북자 문제는 국제법상으로는 중대한 인권 문제(‘사실상의 난민’ 인정·보호 문제)요,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관한 사안이다. 또, 국제사회가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북한의 식량난, 즉 인도적 위기 상황과 관련 있는 문제다. 그럴진대 북한과 중국 양자만이 적당히 해결하려 해선 안 된다. 다자문제화하여 UNHCR 등 국제사회의 인도적 개입을 허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정부는 이런 시각에서 한·중·일·러 등이 참여하는 다자협의체를 구성하고 유엔의 참여를 모색하는 근원적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려면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 선처를 기대하는, 무기력한 ‘조용한 외교’를 대폭 수정해야 한다. 강대국과의 외교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법과 원칙, 그리고 도덕성이다. 또, 적극적인 관심과 ‘당당한 외교’가 문제 해결의 시작이라고 하겠다. 앞으로 국제난민법과 인도주의 원칙, 남북한 특수관계론을 십분 활용하는 대중 탈북자 외교의 재정립과 보다 능동적인 실천을 기대해 본다. 제성호 (중앙대 국제법 교수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문화일보 2004. 6. 18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