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음과 휘말림 사이의 균형 - 김일영
	2004-05-25
버림받음과 휘말림 사이의 균형 미국은 주한미군의 일부를 이라크로 차출하면서 그것을 보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작년부터 우려되던 주한미군 감축이 현실화된 것이다. 이를 두고 한쪽에서는 한미동맹의 와해를 우려하고, 다른 쪽에서는 ‘미군 없는 한국’을 준비하자는 만용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양 극단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축 이후 한·미동맹의 향방에 관해 국익 차원에서 지혜를 모으는 일이다. 결론부터 밝히자면 한국은 동맹국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아서도 곤란하지만 전 세계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미국의 군사전략에 휘말려들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두 선택지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음으로써 한·미 간의 신뢰에 손상이 가지 않게 하는 게 한국 외교가 나아갈 바이다. ‘방기’(放棄·abandonment)와 ‘연루’(連累·entrapment) 사이에서 균형 잡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조만간 한·미 양국은 감군 이후 동맹의 내용에 대한 협의를 시작할 것이다. 이때 협상 테이블에 올려질 의제들은 대부분 방기 및 연루와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이 의제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우리의 균형 잡기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분단 상태가 지속되고 북한이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은 미국으로부터의 방기의 위험성에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미국이 주한미군이 맡던 대북 주요 임무를 예정보다 빨리 그리고 많이 한국에 이양하겠다고 제의하는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 우리의 준비 태세와 비례하지 않는 섣부른 임무 이양은 동맹의 미래를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현재의 한·미 연합작전 계획은 주한미군 3만7000명과 유사시 대규모 지원 병력을 전제로 한 것이다. 따라서 주한미군이 감축된다면 작전 계획을 그에 걸맞게 재조정하는 작업이 한·미 간에 조속히 이루어져 연합방위 태세에 공백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국방 변환 전략에 따라 주한미군은 대북 억지용에서 동아시아 기동타격대로 그 역할이 확대되도록 예정되어 있다. 이번에 주한미군 일부의 이라크 차출은 이러한 역할 변환 작업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주한미군의 역할이 확대될 경우 한국은 한·미동맹으로 인한 혜택뿐 아니라 부담도 동시에 져야 한다. 기존의 연합방위 태세나 수직적인 한·미 연합지휘 체계는 모두 작전 지역을 한반도로 한 것이다. 주한미군이 기동군(機動軍)화하여 그 활동 범위가 한반도를 벗어나는 경우에 대한 대비가 아직까지는 한·미 간에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이번처럼 주한미군 일부가 아예 한국을 떠나 이라크로 가는 경우에는 연합작전 지휘 체계의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 기지를 둔 주한미군이 대만해협의 분쟁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에서 벌어진 테러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투입될 경우 한국군과 주한미군 사이에는 연합지휘 체계나 연합방어 태세상의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이 경우 한국군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미 간에 합의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보다 우려되는 바는 한국이 자칫하면 전 세계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미국의 군사작전에 연루될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점이다. 한국은 미국과의 신뢰를 손상하지 않으면서 연루의 위험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현재의 위계적인 연합지휘 체계를 보다 수평적이고 병렬적인 것으로 바꾸는 대신 보다 많은 방위 책임을 떠맡기 위해 비용을 더 지출해야 할지 모른다. 동맹에 무임승차하던 시대는 갔기 때문이다.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학 교수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조선일보 2004. 5. 25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