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포용적 리더십 보여라 - 박효종
	2004-05-17
통합-포용적 리더십 보여라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기각 결정은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기 때문에 큰 놀라움으로 다가오지는 않지만, 초미의 관심사는 앞으로의 상황이다. 한국 사회에서 탄핵 찬성·반대 세력이 여전히 대립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 국회의 탄핵결정 이후 이제까지의 세월이 “잃어버린 두 달”이 될 것인지 아니면 ‘성숙을 위한 두 달’로 기억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이들의 몫이다. 그 동안 우리는 법치와 절차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심사숙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또, 대의민주주의와 입헌민주주의간의 견제와 균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되새길 수 있었다. 우리 모두 탄핵사태로부터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만 있다면, 기회비용은 적지 않았지만 공동체 전체로 보면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의 직무정지가 지속된 두 달 동안 비교적 법치가 살아 있었다면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입증하는 셈이다. 이번 헌재의 결정에서 누가 승리했느냐, 또는 누가 패배했느냐를 가늠하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 헌재 결정은 운동 경기에서 누가 누구를 확실히 이겼는지를 직권으로 결정하는 심판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유비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이번 결정은 운동 경기보다 재판의 3심제도와 유사하다. 1심에서 유죄판결을 내린 것을 가지고 2심에서 무죄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1심의 유죄판결이 성급하고 잘못됐으니 사과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 2심에서의 판결이 1심에서의 판결보다 더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없다. 다만, 절차가 그렇게 돼 있기 때문에 결과를 받아들일 뿐이다. 절차에 따른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민주주의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국회와 사법부는 나름대로 선택과 판단이 달랐을 뿐이고, 이런 선택과 판단의 차이는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라면 존중돼야 한다. 국회는 주어진 권한의 범위 안에서 그 권한을 행사했고 탄핵을 주도했던 민주당의 조순형 대표나 한나라당의 최병렬 대표는 정치적으로 책임을 졌다. 헌법재판소는 국회의 결정을 기각하면서도 대통령의 잘못을 매섭게 지적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한꺼번에 승자가 되느냐 아니면 깡그리 패자가 되느냐 하는 문제만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 시점에서 새삼 과거를 돌아보면서 국회에서의 탄핵결정이 잘 됐느니 못됐느니 하는 해묵은 논쟁이 재현돼서는 안 된다. 또, 한나라당이 사과해야 한다느니 혹은 헌재가 너무 정치권 눈치를 보았느니 하는 논쟁에 휘말려서도 안 된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과거 소돔과 고모라의 재앙으로부터 피난가던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았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소돔과 고모라의 재앙에서 피난가는 롯의 일행에게 신은 뒤돌아보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호기심에 뒤를 돌아보았고 결국 소금기둥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앞을 보지 않고 뒤를 돌아보는 자의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도 탄핵문제에서 뒤를 돌아본다면 소금기둥과 같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제 앞을 내다보며 새출발을 해야 한다. 민생문제, 금융쇼크, 실업문제 등 난제가 허다하다. 또한, 지금은 회한을 풀고 갈등과 분열을 치유할 때다. 가뜩이나 이념·세대·지역 갈등이 분출하고 있는 현실이다. 탄핵 정국이 유달리 격렬했던 것도 이러한 균열들과 맞물려 상승작용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노무현 대통령은 헌재의 지적 사항을 마음에 새기며 대통령 직무를 처음 시작하는 심정으로 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이제 그런 시기가 왔다. 17대 국회에서 과반수 여당의 탄생은 새로운 리더십의 기회일 터이다. 과거처럼 저항적 리더십으로 일관하기보다는 통합적이며 포용적 리더십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한다. 한나라당도 새로 태어난 야당으로서 과거의 악연을 털어 버리고 대통령과 새로운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삶의 방식)’를 모색해야 한다. 이런 일이 가능할 때 비로소 우리 모두 패배하지 않고 이겼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박효종 (서울대 정치학 교수 / 시민회의 공동대표) 출처 - 문화일보 2004. 5. 17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