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숙한 자주’ 국난 부를수도 - 김경민
2004-02-12
‘미숙한 자주’ 국난 부를수도 1970년대 대학 서클 가운데 가장 인기가 없었던 서클이 탈춤반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국민 모두가 경제 성장에 몰두해 있던 그 시절, 의식주 문제에 혼이 빠진 우리 국민들은 탈춤이니 국악이니 하는 전통적인 문화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서구 문화를 배우고 받아들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에 들어서면 캠퍼스가 온통 사물놀이패의 꽹과리 소리로 가득 차 강의를 제대로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전통문화에 대한 복귀가 시작되는데, 이는 우리의 것을 찾기 위한 자주 의식의 발현이었다. 한 마디로 먹고 살 만하게 되니 우리 본연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한 가정도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윤택해지게 되면 가문의 가호를 생각하게 되고 족보를 뒤지게 되며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 일들을 찾게 된다. 이는 대단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한 국가의 성장 과정에 나타나는 현상과 매우 유사하다. 한 국가나 가정이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자주와 독립성을 유지하려는 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이고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자주는 배타적이 돼서는 안 되고 상생과 협력의 성숙된 자주가 돼야 한다. 성숙한 자주의 분명한 명제는 탄탄한 국력이다. 그리고 탄탄한 국력의 기저에는 견실한 경제력이 뒷받침돼야만 한다. 가까운 일본을 보자. 평화헌법 제9조에 일본의 군사력이 해외로 나가 국제 분쟁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반대가 비등해도, 강대국 미국이 일본의 협력을 요청할 정도로 국력이 커지면 국제사회의 지위가 저절로 격상되는 것이다. 일본의 다음 목표는 헌법을 개정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어 국제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진정한 강대국이 되는 것이다. 이 모두가 일본이 경제대국이 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이 성숙된 자주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독립된 자주를 얻으려 한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들이 인정해 줘야 하는데 그 환경은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다. 피침의 역사가 많은 우리 민족은 안보 불안의 콤플렉스에 깊이 젖어 있기 때문에 사대주의와 자주를 이분법적으로 구분짓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지극히 구태의연한 발상이다. 한국의 국력이 중진국의 반열에 올라서 있는 만큼 우리의 안보를 미국에 의존한다고 해서 자주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강한 나라를 만들기까지 실용적 국익을 위해서,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선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우리의 불편한 속내를 내보이면서 취하는 것이 아니고 국익을 위해 인내하고 그 인내에 성실히 임할 필요가 있다. 지난 50여년간 우리의 안보를 지켜 준 미국과의 군사동맹 관계에 대해 국민 불안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은 “미군을 원하지 않는 곳에 미군을 주둔시키지 않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깊은 속내를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11월 럼즈펠드 장관이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한국의 한 여기자가 “젊은 한국인들이 왜 이라크에 가서 죽거나 다쳐야 하는가”라고 질문하자 50여년 전 한국전쟁에 왜 미국인이 다치고 목숨을 잃어야 했는가라는 질문도 미국에서 제기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한 그의 마음을 읽을 필요가 있다. 독일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국방장관 회의에서는 미군 구조 개편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을 나라가 독일과 한국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미국의 의도를 결론적으로 요약한다. 주한 미군의 수를 대폭적으로 감축한다는 계획이며 이는 실행단계에 접어들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만약 주한 미군이 대폭적으로 감축될 때 우리 정부는 그 공백을 효율적으로 메워 나갈 준비가 돼 있는지 매우 궁금하며, 나라의 힘이 보다 강해질 때까지 실용적 국익을 챙기는 대외정책을 구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주가 자칫 소외로 내몰리면 국난을 맞을 가능성이 짙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여러 번 확인하고 있다. 성숙한 자주는 주변 국가들과 서로 의지하고 공동의 번영을 구가하는 방향으로 목표가 설정돼야 하며 실용적 국익은 튼튼한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나라가 더욱 강해질 때까지, 실용적 국익을 위해 보다 공고한 한·미관계가 복원돼야 할 것이다. 김경민 (한양대 국제정치 교수 / 시민회의 정책위원) 출처 - 문화일보 2004. 2. 12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