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교육프로그램이다 - 남승희
2004-02-09
문제는 교육프로그램이다 70년대 말 고교생의 성장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보았는가? 나는 그 영화에서 교육학자의 탁월한 이론보다 더 설득력 있는 학생들의 교육과 학교에 대한 항변을 들었고, 지금 상황이 그 때보다 나아진 것이 없음을 알았다. 교육이나 학교가 학생들에게 어떤 경험을 제공하는지를 고민하기보다 특정 집단이나 계층의 ‘이념의 샅바싸움’으로 춤추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대 보고서’로 촉발된 고교평준화 정책 논란이 ‘정치의 계절’과 맞물려 거세게 불붙고 있다. 또다시 어른들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얼마 전 한 야당 대표는 “고교평준화 제도는 당분간 유지하되 우열반 편성은 불가피하고, 특목고와 자립형 사립학교를 시장경제원리에 따라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우선, 용어부터 부적절하다. ‘우열반 편성’과 ‘시장경제원리’가 그것이다. ‘우열반 편성’이라는 표현은 ‘수준별 학습’으로 바꿔야 한다. 수준별 학습은 모든 학생들에게 교육적 혜택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수준과 특성의 차이가 커지는 고등학교에서는 이러한 차이가 반영된 다양하고 특성화된 수준별 학습 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하기 때문이다. 또, 특목고나 자립형 사립학교 확대가 ‘시장경제원리’에 따른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도 ‘교육원리’에 따른 것이라고 해야 옳다. 목적형 학교를 설립하는 이유는 교육 과정 운영상, 교육 목표 설정상, 집중적 인재 양성상 필요한 특성화와 다양화의 교육논리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공교육 정상화 방안을 논의할 때 몇 가지 논리적 오류에 빠지는 일이 종종 있다. 공교육 파행과 사교육비 팽창이 동전의 양면 같기는 하지만 사교육비 경감 대책이 곧 공교육 정상화 방안은 아니다. 학교는 학교다워야지 학원 같아서는 안 된다. 학교 교육이 과외 수요를 줄이지 않으면 사교육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논리는 학교가 학원 같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특히, 특목고나 자립형 사립학교의 확대가 공교육을 정상화해줄 것이라는 속단도 경계해야 한다. 경기도지사의 야심찬 ‘특목고 벨트’ 계획에 대해서 도내의 많은 학교가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입시 기관으로 변질될 것이 뻔한 특목고나 자립형 사립학교에 우수 학생들이 몰리게 될 것이고, 다른 학교들은 모두 열등학교가 돼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공교육 정상화의 핵심은 교육 프로그램의 질 확보다. 모든 교사나 모든 학교는 ‘교사가 모든 학생에게 관심을 기울이는가’ ‘학생에게 의견을 밝힐 기회를 주는가’ ‘교사가 학생의 학습을 잘 돕는가’ 등의 질문에 ‘그렇다’고 자신있게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질문 문항에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 공교육 붕괴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정치인들은 학교가 학생들에게 즐거운 기억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내는 곳,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곳이어야 한다는 교육철학을 가졌으면 좋겠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감동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신나는 노래도 가르쳐주는 선생님, 다양하고 효과적인 수업 방법으로 조별 활동을 통해 서로 협동하고 경쟁하며 공부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선생님 말이다. 또, 무엇을 좋아하고 잘 하는지 가족관계나 교우관계는 어떤지 시간 나는 대로 기회 닿는 대로 깊고 따뜻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애쓰는 선생님, 칭찬과 격려와 조언으로 학생이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선생님, 학생의 소질이나 적성을 정확히 파악하여 그것이 학업과 연계되도록 지도하는 선생님 말이다. 한 명의 천재가 수 십만 명의 보통사람을 먹여 살린다는 주장과 믿음으로 다수의 학습권을 방치하는 것은 공교육 정상화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우수한 학생을 길러내는 일이 중요한 만큼 보통학생은 물론 학습 부진아나 부적응아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개인적·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교평준화 정책에 대한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 비평준화 정책이 공교육 정상화의 해결책이라는 편견도 버리는 것이 좋겠다. ‘몇 십 개’의 특목고나 자립형 사립학교 설립에 대한 집착보다는 다양하고 특성화된 교육 프로그램과 수준별 학습 체제로 학교를 재구조화하여 ‘만 개’의 학교를 살려내는 방안을 마련해내는 현명한 정치인을 뜨겁게 포옹해 보고 싶다. 남승희 (명지전문대 교수 / 시민회의 교육포럼 정책위원) 출처 - 문화일보 2004. 2. 7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