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순리적 정의' - 박효종
	2004-02-04
검찰의 '순리적 정의' 검찰이 법원으로부터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한화갑 전 민주당대표에 대해 영장을 집행하려 했으나, 민주당원들의 완강한 저지로 실패했다. 검찰은 “현역 의원이 법원이 발부한 영장집행을 거부한 일은 헌정 사상 처음”이라며 당혹감을 토로했다. 사실 형식논리로 보면 법치국가에서 사법당국이 법을 집행하는데, 한국의 대표적 공당이 물리력으로 저항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민주당은 지난 김대중 정부에서는 법 집행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던 집권여당이 아니던가. 또 정치적 불의를 뿌리뽑고 정의국가를 실현하자는 검찰의 의지가 국민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백년하청의 정치야말로 일그러진 우리 정치의 자화상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문제가 있다. 정의는 숭고한 가치이긴 하나, 실체를 들여다보면 모호하기 짝이 없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로마시대 이래로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는 것이 정의의 개념이었다. 이 ‘몫’의 개념은 잘못한 사람에게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게 될 때 비로소 ‘사법적 정의’로 이어질 수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적정량의 벌을 주는 것이 정의이며, 그래서 정의의 여신, ‘디케’는 그 적정 몫을 정하기 위해 눈을 가리고 있다. 그렇다면 죄에 상응하는 벌의 적정 몫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은 상징일지언정 실체는 아니다. 그렇다면 검찰이나 법원, 누가 정하든 ‘신의 판단’이 아니라 ‘인간의 판단’이기 때문에 벌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란은 얼마든지 불거질 수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가장 현저한 잣대라면 형평성일 수밖에 없다. 형평성이란 엇비슷한 죄를 지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엇비슷한 벌을 내리는 경우로서, 사람들은 이 경우에 비로소 죄와 벌이 비례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불법 경선자금과 관련하여 다른 유력한 후보들을 빼놓고 한 의원에게만 그 책임을 묻겠는다는 검찰의 태도는 ‘눈을 뜨고’ 죄값을 재는 정의의 여신을 방불케 하는 셈이다. 특히 지금의 민주당은 대선의 승자이면서도 패자와 비슷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 상황에서 승자의 잘못은 묻지 않고 패자의 잘못만 묻는다면, 승자가 모든 걸 독식해온 우리 정치의 낡고 오래된 관행에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하는 의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이런 말을 들으면 검찰은 SK그룹 비자금 조사 과정에서 한 의원의 비리가 포착되었기 때문이라며 순수한 의도가 왜곡되었다고 억울해할 것이다. 하지만 윤리 영역이 아닌 정치 영역에서는 ‘의도’보다는 ‘결과’가 중요하다. 교통사고를 낸 사람에게 ‘의도’의 순수성 여부를 따지지 않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과는 반대로, 정치적 승자는 내버려두고 패자에게만 책임을 묻는 가혹한 결과가 되었다면 부덕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이번 검찰의 법집행 의지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행여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했던’ 과거 검찰의 면모가 새삼 투영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기계적 정의’가 아닌 ‘순리적 정의’를 기대한다. 박효종 (서울대 정치학 교수 / 시민회의 정책위원장) 출처 - 세계일보 2004. 2. 4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