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물갈이’ 합법적 절차로 - 윤종빈
2004-01-10
‘정치 물갈이’ 합법적 절차로 17대 총선을 100일 정도 남겨둔 시점에서 정치권은 공천을 둘러싼 진통을 겪고 있다. 특히, 한나라당의 ‘물갈이’ 공천 논쟁은 당내 소장파와 중진들간의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급기야 한 젊은 의원이 용퇴를 결심하고 ‘정치 참회록’을 발표했고, 이어 10여명의 중진 지역구 의원들이 잇따라 불출마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4년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라는 오세훈 의원의 참회는 필자에게 깊은 감동과 자괴감을 함께 안겨주었다. 보통사람으로서는 힘든, 기득권을 버리는, 참으로 용기 있는 행동이다. 그런데 정치개혁이 그토록 성취하기 힘든 이상에 불과하단 말인가. 사람을 바꾸는 것만이 정치개혁을 가로막는 장벽을 허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란 말인가. 최근 정치권이 보여준 말과 행동은 변화와 개혁을 열망하는 국민들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엄청난 규모의 불법 대선자금의 조직적 모금 사실이 밝혀져 국민들의 정치 혐오감이 극에 달하고 있지만 정치권은 많은 시민단체와 정개협이 제시한 정치자금법 개정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비리 연루 혐의를 받고 있는 동료의원들의 체포동의안을 부결시키고도 ‘인사’에 관한 문제는 비밀투표 관행을 지켜야 한다는 뻔뻔한 말을 내뱉고 방탄국회를 열었다. 늦었지만 이번 임시국회에서 처리될 것으로 기대됐던 내년도 예산안도 법정 처리 기한을 훨씬 넘기게 됐고, 지역구 의원수 지키기에만 초점이 맞춰졌던 선거구제 개정은 헌재의 위헌 결정에도 불구하고 해를 넘기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러한 정치권의 실망스러운 행태는 ‘물갈이’ 공천을 통한 인적 쇄신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한다. 국민들이 원하는 공천은 ‘객관적’이고 투명한 잣대에 의해 ‘민주적’으로 수행되는 것이다. 이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돼야 할 ‘객관적’ 기준은 비리에 연루되지 않은 ‘도덕성’, 의정 활동의 ‘성실성’, 정치개혁에의 적극성으로 평가될 수 있는 ‘개혁성’, 그리고 ‘전문성’에 둬야 할 것이다. ‘민주적’ 공천을 위해서는 예비선거를 통한 상향식 공천이 필요하다. 상향식 공천은 총재의 독점적 권한을 약화시키고 의원 개개인의 자율성을 강화시켜 국회의 생산성 향상과 정당의 민주화라는 정치개혁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몇 가지 제도적 장치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예비선거가 오히려 젊고 유능한 새로운 인재의 등원을 가로막는 진입 장벽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상향식 공천이 ‘물갈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지구당위원장과 공직선거 후보를 분리해야 한다. 지구당 조직을 장악한 지구당위원장이 경선에서 누리는 엄청난 프리미엄을 제거해야만 신진 후보가 공정한 기회를 통해 정치권에 진입할 수 있다. 또한, 경선에서 탈락한 후보가 다른 정당이나 무소속으로 본선에 출마할 수 없도록 하는 강력한 규제가 없는 한 예비선거는 또 한 번의 선거로 선거자금만 증가시키는 의미 없는 절차로 전락하게 된다. 비례대표 의원수 증가를 통한 선거제도 개선도 민주적 ‘물갈이’ 공천의 자연스러운 방법이 될 수 있다. 비례대표 의원수의 증가는 사회 각 분야의 직능대표와 전문가의 공급으로 국회가 보다 전문화돼 생산성이 제고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가장 큰 장점은 제1, 제2정당에 주어지는 득표 지지율에 비한 의석 점유율의 과다한 프리미엄이 새로운 군소 정치 세력의 의석 확보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신진 정치인들이 기성 정치인들을 대체하는 자연스러운 세대교체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당선운동을 통한 정치권 ‘물갈이’를 계획하고 있다. 무능한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정치개혁을 맡기지 말고 개혁에의 의지가 있는 의원들을 선별하여 강력한 정치개혁을 요구하겠다는 취지다. 그 명분은 납득이 되지만 사전 선거운동으로 현행 선거법을 위반하는 것은 보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상당수 국민들이 실정법을 위반한 시민단체의 활동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에서 사람을 대폭 바꿔 다시 한 번 정치개혁을 맡겨 보자. 그러나 인적 쇄신은 ‘객관적’ 잣대와 ‘민주적’ 절차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평범한 사람이 누구나 정치를 할 수 있는, 현실과 이상이 일치하는 우리 정치의 미래를 기대해 본다. 윤종빈 (명지대 정치학 교수 / 시민회의 회원) 출처 - 문화일보 2004. 1. 8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