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을 돌아보며 - 박효종
	2003-12-31
2003년을 돌아보며 조그만 구멍가게를 해도 시작과 마침을 따지는 법인데, 한 해를 마감하면서 대한민국에서 치열한 삶을 살아온 우리의 감회가 없을 수 없다. 한 해를 결산하다 보니 충만감보다 회한이 앞서는 까닭은 무엇일까. 낡은 정치의 틀을 깨고 새로운 정치를 기약하는 노무현정부가 출범하고 386세대가 대거 국정에 참여하면서 대선 패배자들의 눈물도 있었지만 개혁에 대한 기대는 가득했다. 결과는 어떠한가. 참신한 개혁의지가 엿보이는 측면도 있었으나, 총체적으로는 통합과 화합의 ‘리더십’보다는 코드정치에 입각한 ‘프렌드십’이 부각된 한 해였다. “대통령 못 해먹겠다”는 말이 나오는가 했더니, 말이 씨가 된다고 불법 대선자금과 측근비리 문제로 재신임을 묻겠다는 대통령의 폭탄선언이 뒤를 이었다. 정치권은 대통령의 이 말 한마디로 난장판이 되었고, “상대방보다 10분의 1 이상 더러운가 그 이하로 더러운가” 하는 문제로 다투는 낯뜨거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참여정부의 정치는 개혁을 내세운 아마추어리즘이었다. 그렇다고 야당과 국회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한나라당이 막강한 다수당임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정부에 반사적으로 대응하는 수준을 넘지 못하다 보니 ‘도토리 키재기’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차떼기’라는 원죄가 있었기 때문일까. 그토록 불법 정치자금 문제로 홍역을 치르고 있으면서도 선거법 개정 하나 똑부러지게 일구어내지 못하고 몸싸움까지 벌여 16대 국회가 위헌이 되는 사태까지 방치하고 있으니, 우리 정치권이 강심장임은 확실하다. 한국정치가 3류정치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회는 사회대로 각종 분열과 갈등의 본산지였다. 진보·보수세력 간의 이념갈등은 각종 국가기념일마다 증폭되어 해방 후 상황을 방불케 하였다. 5060세대의 소외감이 갑자기 깊어진 것도 금년의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또 금년처럼 격렬한 분규와 항의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때도 드물었다. 물류대란, 부안핵폐기장 반대농성 등의 사태를 연이어 접하면서 토머스 홉스가 말한 ‘자연상태’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삼보일배’는 너무나 품위 있는 항의 형태였다. “전경의 얼굴을 때리지 마세요”라는 한 의사의 호소는 공권력의 권위가 폭력 앞에 실추되었음을 웅변했다. 이념갈등과 세대갈등이 너무나 도드라져 이 사회에는 ‘구심력’은 없고 ‘원심력’만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기에 충분한 한 해이기도 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모두를 우울하게 만든 것은 경제다. ‘동북아 경제중심국가’ ‘2만달러 소득 달성’ 등 구호는 현란했으나 7%를 넘는 청년실업률과 300만명의 신용불량자가 웅크리고 있는 상황에서 ‘빚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을 뿐이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검찰수사와 정치권의 싸움으로 기업은 기업대로 고래싸움에 등 터진 ‘새우’가 되었다. 국내의 모든 유수기업들이 불법 대선자금에 연루되어 곳곳에서 출국정지와 압수수색이 벌어져 기업활동이 위축되고 국제신인도가 나빠졌다. 불법 대선자금을 준 기업들의 잘못은 크지만, 국민을 먹여 살리는 것은 정치권이나 검찰이 아니라 기업이라는 진부한 사실이 잊혀진 한 해였다. 수사를 빨리 종결짓고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하도록 도와주어도 시원치 않은데 정치권 싸움이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을 때처럼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기상천외의 각종 재앙들이 발생한 해가 금년이다. 그 와중에서 혹시 ‘희망’이라는 것만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모두 곱씹어 보아야 할 것이다. 박효종 (서울대 정치학 교수 / 시민회의 정책위원장) 출처 - 세계일보 2003. 12. 31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