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색한 특검법 거부 논리 - 박효종
	2003-11-26
군색한 특검법 거부 논리 장고(長考)를 거듭하던 노무현 대통령이 특검법을 거부하고 국회에 재의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번의 특검법은 재신임 정국과 맞물려 있던 민감한 법안이었다. 검찰이 수사하고 있는 사안에 대해 한나라당을 비롯한 야3당이 특검법을 통과시킴으로써 검찰로부터의 반발 등 큰 논란이 불거졌었는데, 이번에는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더 큰 논란의 대상이 될 전망이다. 당장 국회의 기능이 마비되고 있다. 격앙된 한나라당이 의사 일정을 거부한 것이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원론적으로 볼 때, 대통령 스스로 천명했듯이 거부권 행사는 대통령의 고유한 권한이다. 또, 이에 대한 정당성의 논리도 나름대로 개진됐다. 특검이란 검찰이 수사를 회피하거나 수사 결과가 미진했을 때 예외적으로 보완·보충되는 제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고유권한의 논리를 국회가 재적의원 3분의 2이상의 표결로 가결한 법을 압도할 정도의 정당성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는가.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번 문제의 핵심은 특검법이 국회의원 다수의 찬성으로 통과됐다는 사실보다도 특검법의 대상이 대통령측근 비리의혹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렇다면 ‘중이 제 머리를 깎을 수 없다’는 속언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측근비리 문제인 만큼 공정한 수사가 이뤄질 것인지에 대해 많은 사람은 적어도 막연한 의혹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경험적 사례가 그런 의혹을 키워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검찰이 이른바 ‘마니 폴리테’를 자처하며 엄정하게 수사를 한다고 하지만, 사안이 대통령 측근 비리의혹인 만큼 ‘손이 안으로 굽지는 않을까’ 혹은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해묵은 의구심을 상기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또, 측근 비리의혹이 부상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통령으로서는 부덕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노 대통령은 “보고를 받고 눈앞이 캄캄했다”며 대통령직을 걸고 재신임까지 묻겠다는 결의를 내비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지금까지의 결과를 보면 재신임 정국은 은근슬쩍 불법 대선자금 정국으로 넘어갔고 대통령의 측근 비리의혹은 의혹일 뿐 딱히 명백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사실, 정치인으로서 노 대통령의 매력은 중대한 결정상황에서 모든 걸 걸 줄 아는 ‘올인의 승부사’로서 행동해 왔다는 점일 것이다. 이처럼 ‘필사즉생(必死卽生)’의 준칙을 기초로 행동해 왔다는 사실은 지난해 대선때 정몽준 후보와 후보 단일화를 시도할 때도 그랬고, 재신임을 묻겠다고 한 상황에서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특검법 거부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재신임까지 물을 정도로 스스로를 내던질 각오를 다진 노 대통령이 왜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특검법은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국회에서 재의결이 되지 않을 경우 검찰 수사 뒤에 정부 주도로 별도의 특검법안을 제출하겠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지금 당장 특검법을 수용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는가. 이유가 있다면 ‘협박정치’를 일삼는 한나라당이 특검법을 주도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았다면 스스로는 특검법을 할 마음이 있었다는 말인가. 행정부는 행정부의 역할이 있고 국회는 국회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는 법이다. 삼권분립이란 권력을 행사하는 기관들 사이에 갈등을 정당화하는 메커니즘이지만, 한편 그걸 슬기롭게 해소하기를 강요하는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비록 한나라당 주도의 국회 결정이 못마땅한 점이 있고 다수의 횡포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그걸 받아들임으로써 포용력있는 리더십 발휘가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유권한만을 따지는 대통령처럼 속좁은 대통령도 없을 것이다. 대통령으로서의 고유권한도 있지만, 국정 최고책임자로서의 분별력 역시 중요하다. 정치적 분별력이란 정치적 상황에 대한 신중한 판단에 근거한다. 지금 수많은 국정 현안이 국회에 계류되어 있다.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TA) 등은 물론이고 그 이외에 중대한 법안들이 있다. 이와 같은 법안들이 국회의 기능 마비로 다뤄지지 못할 때 그 책임은 누구에게로 돌아갈 것인가. 야당으로 머물러 있는 한나라 등에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국정을 담당하고 있는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귀책사유로 간주될 것인가. ‘정부의 실패’는 일차적으로 대통령과 국정 주도 세력의 책임이지, 야당의 책임으로 보기는 어렵다. 정말로 ‘올인’하는 대통령을 보고 싶었다. 측근의 비리의혹 문제이기 때문에 겸허하게 특검법을 수용하는 대통령을 보고 싶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해 유감이다. 박효종 (서울대 정치학 교수 / 시민회의 정책위원장) 출처 - 문화일보 2003. 11. 26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