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도 이민가는 나라 - 송복
	2003-11-17
기업도 이민가는 나라 규제 강화해 망한 공산주의 … 행정국가서 시장국가로 전환을 옛날 어린아이들이 배우던 천자문에 하준약법(何遵約法) 한폐번형(韓弊煩刑)이라는 재미있는 글귀가 있다. 요사이 말로 풀이하면 한나라의 소하(蕭何)는 규제를 철폐해서 나라를 부흥시켰고, 진나라의 한비(韓非)는 규제를 강화해서 나라를 망쳐버렸다는 뜻이 된다. 이는 예나 이제나 다름없이 통하는 진리다. 규제를 강화하고 강화해서 망한 나라가 공산주의 국가들이라면, 규제를 완화하고 완화해서 번성한 나라가 자유주의 국가들이다. 이런 원리를 자유주의·공산주의가 태동하기 훨씬 이전부터 어린애들까지 배우고 있었다면, 지금의 우리 정부는 그 지적 수준이 어디에 머물러 있다 할 것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여전히 ‘행정국가’ 개념에 집착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할 대로 변해서 잘되는 나라들은 모두 ‘시장국가’로 환골(換骨)했다. 정부가 양손에 규제를 들고 이리 간섭하고 저리 간섭하고, 노조가 쇠파이프를 들고 이리 위협하고 저리 위협하던 ‘행정국가’ 시대는 오래 전에 사장(死藏)되었다. 정부는 룰을 정해서 누가 그 룰을 어기는가를 감시만 하면 된다. 혹은 그 룰에 따라 작동하는 시스템을 누가 파괴하는가를 색출하기만 하면 된다. 그 탈법자·파괴자를 가려내서 시장에서 퇴출시키는 것이 정부의 임무요, 존재이유다. 노조는 노동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노동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행동만 하면 된다. 노동시장에서 노동의 공급자는 근로자이고, 수요자는 기업이다. 양자관계는 수요·공급의 원칙을 철저히 이수해야 하는 경제관계다. 시장에서 노동의 진입과 퇴출이 오로지 이 경제적 손익관계로 이뤄지도록 행동하는 것이 노조의 역할이고 정체성이다. ‘시장국가’에서 정부와 노조는 이 같은 자기 역할 이상이어서도 안 되고, 이하여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시장국가’ 개념이 전혀 없다. 너는 반드시 감을 팔아야 하고 너는 반드시 대추를 팔아야 한다고 규제한다. ‘시장국가’에선 파는 자의 자유다. 그 자유를 지금 우리 정부는 ‘행정국가’답게 규제를 들이밀며 움켜쥐고 있다. 심지어는 신체구조까지 이렇게 바꿔라 저렇게 바꿔라 한다. 이른바 지배구조 문제다. 그 구조가 잘됐는지 못됐는지는 정부보다 시장이 더 잘 안다. 그런데도 정부가 나서 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총액출자까지 제한하겠다고 소리친다. 내 사업이 어려우면 너희를 해고하고, 내 사업이 잘 풀리면 너희를 고용하겠다, 이것은 고용하는 자의 자유다. 그 자유를 우리는 노조가 붉은 띠를 동여매고 화염병을 던지며 뺏아간다. 거기에 정부까지 호응해서 과잉보호한다. 마침내 12%도 안 되는 노조 가입자가 88%의 비정규직 비노조원들의 목을 누르고 있다. 경제관계가 아니라 완전히 정치관계로 바뀌었다. 노동시장은 그 88%만큼 무너져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기업이 이민 가는 나라가 됐다. 기업은 이민을 가면 그냥 가지 않는다. 일자리를 몽땅 들고 간다. 우리 젊은이들 일자리를 그들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갖다 준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투자해서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것보다 우리가 남의 나라에 투자해서 그들 나라에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더 많다. 그렇게 해서 청년실업이 7%를 넘어섰다. 이 모두 ‘행정국가’ 개념에 집착한 결과다. ‘행정국가’는 우리가 못살던 때의 국가모델이다. 그 모델에 충실해서 유례에 없는 발전속도로 산업화했다. 그러나 그 모델의 시효도 80년대 후반까지다. 소득이 1만달러로 들어선 90년대부터는 새모델, 이른바 ‘시장국가’ 모델을 세웠어야 했다. 불행하게도 양김 대통령들은 그런 비전도 지식도 식견도 능력도 없었다. 여전히 과거 국가모델에 빠져서 ‘실패한 정부’만 양산했다. 도대체 정부 부처가 그렇게 많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어째서 장관이 20명이나 되는가. 정부 부처를 절반으로 줄이고 장관 수도 10명 이하로 끌어내려야 한다. 정부 부처가 많은 것만큼 규제가 많은 ‘행정국가’다. 장관 수가 많은 것만큼 ‘시장국가’와는 거리가 멀다. 그 거리만큼 기업은 외국으로 나가고 노조는 전투노조가 된다. 어디에 살길이 있는지 생각하고 생각해야 한다. 송 복 (연세대 명예교수 / 시민회의 공동대표) 출처 - 조선일보 2003. 11. 17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