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위 한정해 신속히 끝내야 - 박성조
	2003-11-14
범위 한정해 신속히 끝내야 ‘노무현’을 생각하면, 첫 이미지가 청문회에서 참신하고 예리한 분석을 하는 정치인으로 남아 있다. 세월이 흘러 그는 대통령이 됐다. 이제 필자가 기대하는 것은 한국을 건전하고 활기 있는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이 된 지금 한국의 현실은 아쉽게도 ‘돈’과 ‘지혜’가 떠나는 나라가 되고 있다. 기업이 떠나면 ‘공동화(空洞化)’현상이 생기고, 인재가 떠나면 ‘공지화(空知化)’현상이 나타나 나라가 경쟁력을 잃게 된다. 한국은 지금 공동화·공지화의 이중적 현상이 가속되고 있어 미래가 걱정스럽다. 한국의 또 다른 현실은 정치자금 파문이다. 현재 불씨가 기업으로 옮아가고 있다. 자본주의의 고질적 문제인 정경유착이 적나라하게 표출되고 있는데다 한국적 특색까지 가미돼 나라 전체가 온통‘흙탕’이 됐다. 국민의 관심이 정치자금 수사에 집중돼 있어 국가가 정상적으로 굴러가는지 알 수가 없다. 니체는 “부패는 한 민족의 만추기(晩秋期)의 상징”이라고 비유했다. 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만큼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이다. 한국이 지금 위기인 것만은 분명하다. 현재의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우리 민족의 미래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 필자는 위기 극복을 위해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결단해야 할 몇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 실정에 맞는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전면 수사후 대사면’론도 나오고 ‘국민 앞에 고해성사’론도 나온다. 몇몇 정치가는 이탈리아와 같이 엄정 수사할 것을 주장한다. 이 모두가 현실적인 안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탈리아의 ‘마니 폴리테(Mani Polite·깨끗한 손, 부정부패 척결운동)’는 수사가 장기화하고 검찰이 관료화하면서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등지고, 당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의회에 자기가 선호하는 법률 전문가를 기용함으로써 부패방지법은 베를루스코니법이 되고 말았다. 독일에서도 부패방지법 제정을 위해 공청회까지 열었으나, 헬무트 콜 총리는 “나는 남자로서 돈을 준 기업을 말할 수 없다. 나는 약속을 지킨다”며 모든 부패 방지 노력을 무시해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2002년 국제부패지수 순위에서 독일은 18위, 이탈리아는 31위로 나타났다. 불법 정치자금 문제를 이번 기회에 완전히 뿌리 뽑겠다면서 수사 범위를 확대해 나라 전체가 수사 때문에 마비돼서는 곤란하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보듯이 검찰 수사가 장기화하고 전분야로 확대될 경우 진실은 규명되지 않고 또 다른 문제만 부각될 뿐이다. 검찰은 정치권 중심으로 수사를 하되 가능한 한 범위를 축소해 신속하게 마무리짓고 앞으로의 방지책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둘째, 기업 수사에 대해서는 한계점을 인식하고 신속히 마무리지어야 한다. 부패와 성장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은 없다. 부패가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되느냐, 또는 저해 요소가 되느냐는 그 나라의 발전 정도와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우리나라도 기업 수사의 신속성과 한계점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제반 규제들과 연결되면서 기업의 경쟁력만 약화시킬 뿐이다. 이번 수사의 초점이 불법적인 정치자금에 있는 만큼 정치권 중심으로 수사를 진행하고 기업에 대해서는 확인 정도에서 끝내어 경영에 지장이 있도록 해서는 안 된다. 정치권이 수사에 협조하지 않고 완강히 버티니까 힘없는 기업만 조사한다는 오해를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셋째, 부패 자체에 너무 얽매여서는 안 된다. 국제부패기구 독일지부 부회장 앙케 마르킨은 부패방지방안을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부패 자체를 스캔들화해서는 안 된다. 부패는 음지에 있기 때문에 양지로 끌고 나와 투명화시켜야 한다.” 스위스 의사협회의 쿤 박사는 스위스 의사신문에서 “부패를 밝히는 것은 도움이 되나 만병통치약은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언제 어디에 살든지 ‘부패현상’은 인간 본능인 것 같다. 완전히 부패를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제도화하려는 노력은 높이 평가하나 한계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잘 운용하여 나라 전체가 경쟁력을 갖도록 하느냐 하는 것이다. 부패 방지가 지상과제인 것처럼 나라 전체가 그곳으로 달려가서는 안 된다. 국가선(國家船) 선장인 대통령은 한국이 자본주의 경쟁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그 방향으로 배를 돌려야 한다. 박성조 (자유베를린대 교수/서울대 행정대학원 초빙교수/시민회의 고문) 출처 - 문화일보 2003. 11. 14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