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의 전쟁'이 남긴 것 - 정진영
	2003-11-10
'언론과의 전쟁'이 남긴 것 노무현 대통령이 신문·방송사의 편집·보도국장들과 연쇄적으로 만났다. 국정현안을 설명하고 서로의 이해를 돕자는 취지에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회동은 지금까지 노 대통령이 언론에 대해 보였던 태도와는 사뭇 다른 것이어서 상당한 기대를 갖게 한다. 사실 노 대통령은 당선 이후 최근까지 일부 언론사와는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의 불편한 관계를 보였었다. 이에 비해 특정 신문·방송사에는 우호적인 태도를 가졌었다. 노 대통령의 ‘코드정치’가 언론관계에도 투영된 결과였다. 그러면 노 대통령이 지금 언론에 보이고 있는 획기적인 태도 변화의 연유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실질적인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노 대통령에게 언론과의 관계 개선을 강력히 요구했다고 한다. 총선을 앞두고 신당을 차리고 있는 상황에서 언론과의 전쟁이 대통령과 여당에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 가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재신임·대선자금 정국을 무난히 돌파하고, 대통령의 리더십을 복원하려는 목표 때문일 것이다. 노 대통령은 정치를 도덕적 기준으로 평가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자신은 옳고 깨끗한 데 비해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부패하고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측근들의 비리가 드러나고 자신도 결코 구태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남을 비난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타협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언론과의 관계 개선에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다. 노 대통령이 원로 지식인들과 만나 “새 시대를 여는 맏형이 되고 싶었는데, 구시대의 막내 노릇을 할 수도 있겠다”는 심경을 피력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동안 참여정부가 벌인 언론과의 전쟁은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첫째, 노 대통령 스스로 “언론과의 불편한 관계로 국민께 다소 불안을 드린 점이 있다”고 인정하고, “정부와 언론이 서로 협력해서 국민에게 희망과 비전을 주도록 노력하자”고 제안했다. 이와 같이 참여정부의 언론과의 전쟁은 정권 초기 중요한 시점에 불필요한 일로 정치력을 소모하고 국민을 불안하게 만든 결과를 초래했다. 둘째, 언론과의 전쟁은 국민통합이 아닌 국민 편가르기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수세에 몰린 보수세력이 급속히 조직화되고 결집함으로써 보·혁 대결이 가시화되고 있다. 셋째, 언론 편가르기와 일부 언론과의 전쟁은 국제언론인협회(IPI)로 하여금 한국을 계속 언론탄압 감시 대상국 목록에 오르게 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의 언론사 세무조사로부터 비롯된 이 같은 불명예가 참여정부 출범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권력과 언론 사이는 너무 가까워도 안 되고, 너무 멀어도 안 된다는 말이 있다. 권·언 사이에는 합리적인 긴장관계가 필요하다. 이것이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고 권력을 견제하는 길이다. 따라서 정부와 언론의 관계 개선은 누가 누구에게 잘해주고 못 해주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권력이 언론을 누구편이냐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한 권력과 언론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수립될 수 없다. 문화관광부 장관은 국회에서 우리나라의 언론자유는 정부가 아니라, 소수의 지배적인 언론매체에 의해 제한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가 이 같은 시각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나라가 언론후진국의 불명예를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진영 (경희대 정치학 교수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세계일보 2003. 11. 10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