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惡'을 피할 수 없을 때의 선택 - 박효종
	2003-11-04
'惡'을 피할 수 없을 때의 선택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 4·3사건과 관련하여 사과한 것은 일단 국가 권력의 과잉 사용에 대해 진솔하게 잘못을 인정한 것으로, 국가 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반성적 평가라고 볼 수 있다. 최근의 국제 사례를 보더라도 국가가 자신의 권력의 오·남용에 대해 사과한 사례들이 있었다. 1998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우간다를 방문했을 무렵 노예제도에 대하여 사과한 적이 있고, 크메르루즈의 지도자였던 키우 삼판과 누온체아 등은 대규모의 무고한 시민을 마구잡이로 처단한 ‘킬링필드’에 대하여 사과했다. 그렇다면 4·3사건은 이들과 그 성격이 같은 것일까.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이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을 정점으로 해서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지속된 무력충돌은 대한민국 정부의 탄생 과정에서 불가피했던 진통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공짜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가혹한 도전을 극복하고 탄생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현대사와 정부수립은 갖가지 모순과 부조리 속에 진행되어왔다. 해방이 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전혀 결정권을 가질 수 없었다. 우리는 일본의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국가이면서도 미국과 소련의 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모순에 봉착했다. 이러한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우리의 가치와 이념대로 정부를 세울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의문시되기도 했다. 결국 우리는 남북한 통합정부를 세우기를 포기했고, 남한만으로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상황에서 4·3사건이 터진 것이다. 모순 속에서 하마터면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던 정부 수립 과정에서 ‘정상 국가’로서의 면모와 작동양식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사실 4·3 사건뿐만 아니라, 그 이외에 일어난 수많은 남로당 무장 봉기사건과 진압조치들은 악이다. 평화시위 상황과 비교하면 무고한 희생자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던 가슴아픈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장봉기를 진압하지 않을 수도 없었고, 또 정교한 방식으로 유혈봉기를 진압하는 방식을 체득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악이라면 우리는 어떤 악을 선택해야 했을까. 더 작은 악인가, 아니면 더 커다란 악인가. 남로당의 무력봉기를 진압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한국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큰 악’에 비한다면 ‘작은 악’이 아니겠는가. 이런 점에서 보면 노예제도는 정말로 큰 악이었고 ‘킬링필드’도 거악이었다. 인간을 한낱 짐승처럼 노예 취급하고 사지로 내몬 것은 거악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거악이 벌어진 데 대해서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다. 그저 사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4·3사건은 다르다.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나, 그것은 거악보다 작은 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지금 와서 작은 악을 선택한 것을 탓한다면, 마치 6·25 당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 대해 우리가 반격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무고한 희생자 발생을 거악으로 취급하는 것만큼이나 유감스러운 일이다. 정부는 좀 더 신중하고 균형 잡힌 눈으로 4·3 사건을 바라보아야 했다고 생각한다. 정치공동체는 중차대한 공동체이다. 공동체가 지향하는 규범이나 가치가 있게 마련이고, 그것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 자위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제주사태야말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정체성 수호 과정에서 일어난 고육책이었다고 생각된다. 박효종 (서울대 정치학 교수 / 시민회의 정책위원장) 출처 - 세계일보 2003. 11. 5 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