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먼저 고백하라 - 정진영
	2003-10-31
대통령이 먼저 고백하라 대통령 선거와 새로운 정권 출범 이후 신당이 출현하고 대선자금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것은 한국 정치의 오래된 레퍼토리이다. 다만 이번의 경우가 예전과 다른 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여당이 분열하여 미니 신당이 출현하는 이른바 ‘뺄셈의 정치’가 이뤄졌다. 과거에는 신정부 출범 이후 거대 여당이 출범했었다. 둘째, 대선자금 문제를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은 예나 이제나 여전하지만, 이번에는 관련자들이 매우 빨리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검찰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높은 것도 예전과 다른 점이다. 그러면 작금의 정치자금 공방이 과거의 한국정치 패턴에 종지부를 찍고, 투명하고 깨끗한 새로운 정치를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인가.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정치권도 이러한 국민적 여망에 부응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망과 인식의 공유가 새 정치를 위한 결실을 보기까지는 이번에도 만만치 않은 난관들을 극복해야 할 것 같다. 첫째, 무엇보다도 지금의 위기를 수습할 마땅한 해법이 없다. 검찰 조사를 기다려 보자거나 특검을 실시하자는 주장은 정치적 사건을 사법적으로 처리하는 데 있어서의 근본적인 한계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사법적 수사는 불법 행위의 단서가 잡힐 때에나 가능한데, 이는 형평성 문제를 불가피하게 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형평성 시비가 일어나면 사법적 심사는 정쟁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진실을 밝히기는 어려워진다. 그러한 상황에서 정치 발전의 계기가 마련될 수는 없다. 정치권이 함께 이른바 고백성사를 하고 사면을 실시하는 방안 역시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어느 때보다 높은 현 상황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둘째, 총선을 6개월 남겨 놓고 정파들간의 이해관계가 매우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타협도 쉽지 않다.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사이의 대선자금 공방전은 호남표를 차지하기 위한 두 정파간의 대립이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열린우리당의 한나라당 공격은 개혁 대 수구라는 대립 구도를 만들어 신당의 입지를 넓히기 위한 전략이다. 한나라당의 ‘전면 특검’ 주장은 대통령과 신당의 도덕성에 타격을 주기 위한 전략이다. 이와 같이 선거를 앞둔 각 정파들의 전략적 행동은 선거가 가까워올수록 더욱 치열한 공방전으로 나타날 것이다. 셋째, 정치자금 수수의 구조적 요인들이 상존하고 있는 것도 커다란 걸림돌이다. 돈이 조직을 움직이고 표를 모으는 데 효과적인 수단으로 통하는 한 정치인들은 돈을 필요로 할 것이다. 기업들이 과거의 잘못에 대한 처벌을 면하고 특혜를 차지하기 위해서 정치적 끈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한 그들은 돈을 갖다 바칠 것이다. 음성적인 자금 수수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이러한 정치 풍토가 사라지지 않는 한, 정치자금법을 강화한들 큰 효과가 없을 것이다. 파울 플레이가 게임에서 이기는 데 유리하다면, 이것을 법적 장치로 막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위기를 과거처럼 결실없이 끝내지 말고 어떻게 새로운 정치 실현을 위한 기회로 만들 것인가. 우리는 이를 위해 이제 대통령이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측근인 최도술씨의 SK 비자금 수수에 대해서 국민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대선자금 문제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청와대에서 만난 야당 대표에게 어느 쪽도 대선자금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규모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날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자신이 상대방보다 더 깨끗하다는 도덕적 판단을 포함한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불법적 정치자금 문제를 도덕성의 상대적 비교를 바탕으로 인식한다면 해결은 불가능하다. 어느 쪽이든 자기 탓은 안하고 남의 탓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최병렬 대표는 한나라당의 SK 비자금 불법 수수와 관련하여 ‘석고대죄(席藁待罪)’라는 표현을 써가며 사과했고, 이회창 전 총재는 ‘무릎을 꿇고 사죄’한다고 했다. 전경련도 국민에게 사죄했다. 이제 노 대통령이 대선자금의 전모를 밝히고 국민에게 용서를 구할 차례이다. 모른다는 말은 변명에 불과하다. 관련자들에게 조사를 시키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고백은 야당으로 하여금 대선자금 전모를 공개하도록 만드는 큰 압박이 될 것이다. 이로써 한국 정치를 새롭게 출발시키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지금의 국민 여론을 감안할 때, 자신의 잘못을 진실되게 고백하고 진정으로 사죄하는 정치 세력이 다음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다. 정진영 (경희대 국제지역학부 교수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문화일보 2003. 10. 31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