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교육 틀 새로 짜라 - 권대봉
	2003-10-24
고교교육 틀 새로 짜라 지금은 정부가 고등학교 교육의 새로운 구상과 전략을 내놓을 때이지, 부동산 종합대책의 일환으로 땜질식 교육 처방을 할 때가 아니다. 불과 한달 전에 건교부는 판교신도시에 학원단지를 조성하여 서울 강남지역 대체효과를 노리겠다는 정책을 발표했었다. 그러다가 국민 여론에 밀려 학원단지 조성은 백지화하고 자립형 사립고와 특수목적고를 유치하는 것으로 바꾼 바 있다. 그런데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정부는 “부동산 가격 상승의 원인인 서울 강남에 대한 교육 수요를 분산시키기 위해 강북 뉴타운지역에 특목고와 자립형 사립고를 많이 세울 계획”이라며 “특목고 입학시 강북지역 학생들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이 오는 29일 발표할 부동산 종합대책에 포함될 것”이라고 했다. 이미 성북구 길음뉴타운에는 사설학원이 모일 수 있는 학원단지를 마련하여, 자립형 사립고와 연계한 에듀파크를 만드는 기본계획을 확정했다고 한다. 정부는 일반 고교보다는 자립형 사립고나 특목고가 학부모에게 더 매력적이라고 판단하는 것 같다. 정부 대책이 이렇게 나오니까 사람들은 서울 강남지역에 자립형 사립고와 특목고가 꽤 많이 있는 줄 착각하고 있다. 사실은 서울지역에는 현재 단 한 곳의 자립형 사립고도 없다. 강남·서초·송파구에는 외국어고나 과학고가 한 군데도 없다. 대부분의 특목고는 강북지역에 있다. 몇몇 자립형 사립고와 특목고가 일부 학생들의 교육 수요는 충족시킬 수 있겠지만, 나머지 대다수의 학생들은 현재의 상태로 방치할 작정인지 걱정이다. 전국 곳곳을 모두 강북 뉴타운처럼 개발하지 않는 한, 정부가 계획하는 뉴타운은 희소가치로 인해 또 다른 부동산 투기장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교육에 있어서 평등성도 중요하고 수월성도 중요하다. 문제는 고등학교 수준에서 수월성을 도외시하는 데에 있다. 학생 능력을 고려하지 않는 획일적인 평등적 교육 틀을 바꾸지 않고서, 역대 정부가 무수한 교육정책을 시행했지만, 아직도 학부모는 엄청난 사교육비에 몸살을 앓고 있으며 공교육은 정상화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학업 수준이 천차만별(千差萬別)인 학생들을 추첨에 따라 배정받은 고등학교가, 과목별·수준별로 반을 편성해서 학생 수준에 맞게 교육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자기 수준에 알맞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과외나 사설 학원을 찾아가게 되므로, 학교 교육이 황폐화된 것이 사실이다. 지금은 평준화 지역에 거주하면 추첨으로, 비평준화 지역에 거주하면 경쟁 입시로 고교에 진학하는 제도이므로 선택의 자유가 없다. 고교 교육의 새로운 구상은 교육 수요자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전국 시·군·구의 지방자치단체가 교육구청과 손잡고 일반계 고교를 자립형 사립고, 자율형 공립고, 특성화고, 특수목적고 등 다양한 학교로 전환하거나 유치해야 학생에게 선택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지자체간의 교육 경쟁이 치열해져서 고교 교육이 살아날 수 있고, 사교육도 본래의 보조적인 역할로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다. 학생이 평준화된 학교에 다니든 비평준화된 학교에 다니든 간에 자기 수준에 맞는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현재의 평준화 틀에서도 학교에서 이러한 학생의 학습권이 보장된다면, 고교 교육이 정상화될 가능성이 있다. 학교는 학력 수준별로 학년에 관계없이 과목별 반 편성을 하여 학생들이 자기 수준에 맞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된다. 예를 들면, 2학년 수준의 수학 실력을 갖춘 1학년 학생이 반드시 1학년 교실에서 수학 수업을 받아야 하는 것이 현 실정이다. 그러나 이 학생을 2학년 교실의 자기 수준에 맞는 그룹에 가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고, 만약 고교 수준 이상의 수학 실력을 가진 고등학생이라면 대학에 가서 학점을 이수할 수 있도록 틀을 바꾸는 것이다. 교육의 수월성과 평등성은 똑같이 존중돼야 한다. 학생의 능력과 관계없는 절대적 평등성을 추구하는 정책은 교육을 공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학생의 수학 능력을 고려한 상대적 평등성을 보장하는 틀로 바꿔야 교육이 혼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교육의 상대적 평등성이 보장될 때, 교육의 수월성을 추구할 수 있고 국가의 미래를 이끌 인재를 제대로 양성할 수 있다.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교육의 틀로 새롭게 구상할 생각은 없는가. 권대봉 (고려대 교육학 교수 / 시민회의 교육포럼 회장) 출처 - 문화일보 2003. 10. 24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