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생각해 보는 ‘민주정부’ - 박효종
2003-10-13
다시 생각해 보는 ‘민주정부’ 인도네시아에서 돌아온지 만 하루도 안 되어서 노무현 대통령은 재신임을 묻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노 대통령의 ‘집사 중의 집사’로 꼽히는 최도술씨가 SK로부터 불법 선거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결코 작은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재신임을 물을 정도의 중대사안인가 하는 점에 수긍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 문제는 일단 검찰 수사에 맡기고 결과가 나온 다음 대통령이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결코 늦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대통령이 책임을 통감한다고 해도 출범 초기의 정권에 대해 재신임을 묻겠다는 충격적 방식 이외에 다른 합리적인 방법도 없진 않을 것이다. 재신임을 묻겠다는 것은 내각중심제도 아닌 대통령책임제 국가에서 ‘과잉’ 정치행위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 동안 우리사회에서 대통령이 도덕적 실책으로 투영된 중대사안으로 인하여 책임을 져야할 일이 있을 때 취한 방법은 대국민 사과였다. 대통령의 사과는 자신의 귀책사유로 볼 수 있는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을 때 부덕의 소치임을 인정하여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고 앞으로 그러한 일이 재발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는 ‘석고대죄(席藁待罪)’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중간평가를 통하여 재신임을 묻겠다는 발상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대선전에 공약한 적이 있으나, 정작 임기중에는 우여곡절 끝에 취소되기도 했다. 측근의 비리 의혹으로 재신임을 묻겠다는 것은 헌정사상 초유의 일로 노 대통령의 ‘도덕적 감수성’이 다른 대통령보다 무척 예민하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또한, 이전에 자신의 부도덕한 정치 행태를 고치지 않고 사과만 거듭해 왔던 이전의 ‘사과정권’보다 당당하게 국정에 임하겠다는 비장한 결의의 한 단면으로 볼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취임 7개월밖에 안된 노무현 대통령으로 하여금 이런 중차대한 발표를 하게 만든 요인은 무엇일까. 대통령은 “도덕적 신뢰만이 국정을 이끌어나갈 밑천”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른바 ‘도덕적 자본’의 결여를 그 원인으로 꼽았다. 과연 그럴까. 도덕성이 대통령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며 도덕성의 결여가 정부의 중대결함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덕성이 정부의 정당성을 유지하는데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단언할 필요는 없다. 사람들은 도덕성이 낮으면 낮은 대로 최선을 다하는 정부의 모습이나 측근의 비리의혹이 심각하더라도 그럴수록 국정에 진지하게 임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또, 도덕성이 부족하다고 해도 국가의 비전을 명확히 제시하고 혼신의 힘으로 이를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포용적 리더십을 발휘하며 고언에 귀를 기울이는 정부라면 민주정부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는 데 큰 손색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도덕성이 비교적 완벽하다고 해서 그 점을 빌미로 독선과 오만, 아집으로 국정을 운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민주적 정부의 전형적 모습일 터이다. 필자가 보기에 노무현정부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도덕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소수정권이면서도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다수 정권처럼 자신만만하게 행동해 왔다는 점이다. 소수 정권이면서도 다수를 껴안으려는 포용력이 부족한 것이 역력했다. 이념적 ‘코드’가 다르다는 이유로 반대자들에 대하여 각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지지자며 후원자들에 대해서까지 ‘성골’과 ‘진골’을 구분하면서 공식 여당인 민주당마저 냉랭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분당이었고 대통령의 리더십은 더욱 초라해졌다. 그런 와중에 끊임없이 불거지는 측근들의 비리연루 의혹은 대통령을 못 견디게 했을 것이다. 그것이 최후의 승부수를 띄운 이유이다. 즉, 도덕성 결여보다는 정치적 독선과 오만으로 지지율 하락과 권위의 추락을 자초한 것이 아닐까.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진 것 같다. 정면승부를 통하여 정국돌파를 하고자하는 전략적 사고가 배어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모든 걸 걸고 재신임을 묻겠다는 노 대통령의 의지에는 진지함이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보이기 때문에 그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우리 사회가 이번 재신임 정국을 잘 넘길 수만 있다면 민주정부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가질 수 있고 한국 민주주의가 천민민주주의를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정혼란과 경제혼란 등, 기회비용이 최소화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박효종 (서울대 정치학 교수 / 시민회의 정책위원장) 출처 - 문화일보 2003. 10. 13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