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대통령 안돼야 - 박효종
2003-09-30
벌거벗은 대통령 안돼야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을 전격 탈당했다. 그 동안 노 대통령은 유달리 당·정 분리를 강조하고 미국 대통령의 국정 운영 방식에 대한 호감을 표시하는 등, 나름대로 여야 구분 없는 국정 운영을 생각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엔 감사원장 임명 동의안과 관련하여 민주당의 비협조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 같다. 지금으로선 무당적 대통령이야말로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은데, 과연 노 대통령의 이러한 리더십 실험이 초당적 리더십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 무당적의 대통령이 한국의 정치 발전에 기여하는 측면을 과소 평가할 수는 없다. 특히, 대통령의 무당적 상태가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감정적 대응이나 기회주의적 발상의 소산이 아니라 확고한 정치철학이 바탕이 된 결단의 범주로 앞으로의 대통령 임기 내내 지속된다면, 새로운 정치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창조적 파괴’라는 청와대의 자기 변호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동안 한국 대통령의 국정 운영 방식이 끊임없는 비판의 대상이 돼 온 것도 제왕의 권력에 손색없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동시에 소속 정당의 파당적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암암리에 안간힘을 쏟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정책 수행에 있어 루소의 ‘일반의지’를 방불케하는 국가적 사고를 하지 못한 채 특정 지역이나 특정 정당에 편파적인 ‘특정의지’를 구현하는 정략적 사고를 해온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대통령이 갖고 있는 권한은 막강한데, 그것을 국가의 이익이나 국리민복(國利民福)보다 당리당략적 차원에서 오·남용하다 보니 기상천외(奇想天外)의 무리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힘으로 야당 국회의원을 빼내 오고 국회의원 공천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낙하산으로 공공기관에 임원으로 내려보내는 등, 공익과 사익을 구분하지 못한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이런저런 이유들로 인하여 당적을 가진 대통령은 ‘낡은 정치’의 상징이 됐고 따라서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당적을 버려야 한다는 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이번 노 대통령의 민주당 탈당을 보고 그러한 의미의 무당적 대통령, 즉 ‘탕탕평평(蕩蕩平平)의 대통령’을 기대할 수 있을까. 노 대통령은 통합신당에 대한 호감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력하게 표명해 왔다. 물론 신당에 대한 지지적 태도를 표명하는 것과 신당에 입당하는 것은 다르다고 대통령 자신이 강변했지만, ‘이현령 비현령(耳懸鈴鼻懸鈴)’의 상황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대통령이 각별히 선호하는 정당이 있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일진대, 모든 정당에 대해 등거리를 유지하며 국정 협의를 하겠다는 것은 희망 사항일 뿐, 현실 정치는 아닐 것이다. 더구나 일정 시간이 흐른 뒤 대통령이 통합신당에 입당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철새정치인’이라는 일부의 비아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듯하다. 이제 대통령은 국민도 직접 상대하고 정당도 직접 상대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정당들과 직접 대화하겠다는 포부와 의도는 좋지만, 정당이라는 매개물 없이 국민을 직접 상대하다보면 포퓰리즘으로 흐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 책임정치의 실종이라는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는 많은 공약과 약속을 하면서 표를 구했는데, 그것은 후보자 개인이 한 것이라기보다는 철학과 소신을 같이 하는 정치 조직이 했다고 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노 대통령은 처음부터 정당정치에 소극적이었다. 물론 대통령의 비주류 의식이 강하여 그랬는지 혹은 기존 정당에 익숙지 못하여 그랬는지 모르지만, 유달리 ‘코드정치’와 ‘코드인사’를 강조했다. 그랬기 때문에 이질적인 여당의 무게도 부담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코드정치’와 ‘코드인사’가 과거의 지역 편중 인사나 가신그룹 중용과 같은 개념은 아닌 것이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사람심기’와 딱히 다른 것도 아니었다. 국민과의 ‘눈높이 정치’나 ‘눈높이 인사’와 달랐던 것이다. 지금 노무현정부는 집권 초기에 무집권당이라는 새로운 정치 실험을 하고 있다. 이 실험은 위험부담이 작지 않다. 분명한 것은 ‘코드정치’를 고집하면서 여당 없는 정부를 자임할 때 ‘벌거벗은 임금님’을 상기시키는 ‘벌거벗은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 결과는 국정 혼란일 터이다. 하지만 ‘코드정치’에서 벗어난다면 여당 없는 정부는 미국식의 정책연합이라는 새로운 정치의 장을 열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노무현정부의 정치 실험이 어떻게 귀결될는지 주의깊게 지켜볼 것이다. 박효종 (서울대 정치학 교수 / 시민회의 정책위원장) 출처 - 문화일보 2003. 9. 30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