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케팅 회사에서 일할 때다. 영화 전단이나 예고편 영상을 만들면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받아야 했는데 숱하게 퇴짜를 맞았다. 예술 영화 카피로 '생의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하고 싶다'고 써서 보냈는데 빨간 줄이 그어져 돌아왔다. 대체 뭘 하고 싶은지 의도가 불순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과도한 상상력에 늦었지만 경의를 표한다. 폭주족을 다룬 영화 예고편도 반려된 적이 있다. 중앙선을 넘어 오토바이들이 질주하는 장면이 문제였는데 사유는 이랬다. 도로교통법 위반. 20년 전, 너 나 할 것 없이 무식했던 시절이니 더 탓하지는 말기로 하자.
지난 8월 말까지 일 년 동안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에서 심의위원으로 일했다. 공모제였고 지원해서 뽑혔다. 나도 칼 한번 잡아보자, 같은 며느리 심보 절대 아니었다. 다만 그 시스템이 궁금했을 뿐이다. 슬쩍 직원에게 물었다. 93년도에 영화 전단 심의하시던 분이 누구예요?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안 가르쳐준다. 아이 참, 다 용서했다니까.
오리엔테이션을 하던 날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백설공주'라는 영화를 틀어주더니 등급 판정을 해 보란다. 우리가 아는 그 동화에 권선징악의 결말, 당연히 전체 관람 가를 적어냈다. 대부분 같은 의견이었는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영등위에서 외국 사례를 보여줬다. 놀랍게도 미국에서 '백설공주'가 받은 등급은 PG였다. 관람 시 부모의 지도가 필요한 영화라는 이야기다.
이유를 듣고 더 놀랐다. 영화 속 언어폭력 때문이라는데 우리는 영화 속 언어가 폭력적이라는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의 평소 언어생활이 심히 거칠다는 반증이겠다.
올해 영등위의 이름을 널리 회자시킨 건 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 파동이다. 영화를 만들 때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까 고민하는 감독답게 역시 이번에도 서로 '만나서는 안 되는 살(肉)'에 대한 극단적 설정이 들어있다. 영등위는 당연히 제한상영가 판정을 내렸다.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으면 일반 극장 대신 제한 전문 상영관으로 가야 한다. 문제는 국내에 제한상영관이 없다는 사실이다. 있지도 않은 제한상영관 판정을 내리는 영등위는 제정신인가? 지켜본 바로는 제정신이다. 어떤 분들은 일반 극장을 일시적으로 제한상영관으로 활용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령' 15조를 보면 기존 영화 상영관을 활용하는 것은 불가로 되어있다. 그럼 아예 새로 짓는다? 한 해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는 작품은 10편 미만이다. 이걸 틀겠다고 영화관을 만드는 건 정상인의 셈법이 아니다. 결국 법 개정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얘기고 창작의 자유, 표현의 자유와 충돌하는 건 영등위가 아니라 관련 법이라는 말씀이다.
유치하다며 '초딩'도 야동을 안 보는 21세기에 선정성을 이유로 무슨 제한상영 판정이냐는 비판도 늘 따라다닌다. 마지막으로 사형 집행을 한 게 15년 전이다. 그래도 법원은 꾸준히 사형선고를 내린다. 형과 무관하게 죄질에 대한 판결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영등위는 해당 영역에서 한 사회가 지켜야 하는 도덕적 기준의 상징인 셈이다.
영등위 일 년 동안 역지사지 심정으로 많은 것을 깨달았다, 고 하면 거짓말이고 다만 확신하게 된 것은 시스템은 두드려 패는 가격(加擊) 대상이 아니라 풍자와 골계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문화와 예술의 힘은 거기 있다. 힘만 있고 머리는 없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기도 하다.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바른사회 운영위원) 출처 - 조선일보 2013. 10. 5 남정욱 교수의 명랑笑說
영화 마케팅 회사에서 일할 때다. 영화 전단이나 예고편 영상을 만들면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받아야 했는데 숱하게 퇴짜를 맞았다. 예술 영화 카피로 '생의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하고 싶다'고 써서 보냈는데 빨간 줄이 그어져 돌아왔다. 대체 뭘 하고 싶은지 의도가 불순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과도한 상상력에 늦었지만 경의를 표한다. 폭주족을 다룬 영화 예고편도 반려된 적이 있다. 중앙선을 넘어 오토바이들이 질주하는 장면이 문제였는데 사유는 이랬다. 도로교통법 위반. 20년 전, 너 나 할 것 없이 무식했던 시절이니 더 탓하지는 말기로 하자.
지난 8월 말까지 일 년 동안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에서 심의위원으로 일했다. 공모제였고 지원해서 뽑혔다. 나도 칼 한번 잡아보자, 같은 며느리 심보 절대 아니었다. 다만 그 시스템이 궁금했을 뿐이다. 슬쩍 직원에게 물었다. 93년도에 영화 전단 심의하시던 분이 누구예요?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안 가르쳐준다. 아이 참, 다 용서했다니까.
오리엔테이션을 하던 날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백설공주'라는 영화를 틀어주더니 등급 판정을 해 보란다. 우리가 아는 그 동화에 권선징악의 결말, 당연히 전체 관람 가를 적어냈다. 대부분 같은 의견이었는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영등위에서 외국 사례를 보여줬다. 놀랍게도 미국에서 '백설공주'가 받은 등급은 PG였다. 관람 시 부모의 지도가 필요한 영화라는 이야기다.
이유를 듣고 더 놀랐다. 영화 속 언어폭력 때문이라는데 우리는 영화 속 언어가 폭력적이라는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의 평소 언어생활이 심히 거칠다는 반증이겠다.
올해 영등위의 이름을 널리 회자시킨 건 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 파동이다. 영화를 만들 때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까 고민하는 감독답게 역시 이번에도 서로 '만나서는 안 되는 살(肉)'에 대한 극단적 설정이 들어있다. 영등위는 당연히 제한상영가 판정을 내렸다.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으면 일반 극장 대신 제한 전문 상영관으로 가야 한다. 문제는 국내에 제한상영관이 없다는 사실이다. 있지도 않은 제한상영관 판정을 내리는 영등위는 제정신인가? 지켜본 바로는 제정신이다. 어떤 분들은 일반 극장을 일시적으로 제한상영관으로 활용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령' 15조를 보면 기존 영화 상영관을 활용하는 것은 불가로 되어있다. 그럼 아예 새로 짓는다? 한 해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는 작품은 10편 미만이다. 이걸 틀겠다고 영화관을 만드는 건 정상인의 셈법이 아니다. 결국 법 개정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얘기고 창작의 자유, 표현의 자유와 충돌하는 건 영등위가 아니라 관련 법이라는 말씀이다.
유치하다며 '초딩'도 야동을 안 보는 21세기에 선정성을 이유로 무슨 제한상영 판정이냐는 비판도 늘 따라다닌다. 마지막으로 사형 집행을 한 게 15년 전이다. 그래도 법원은 꾸준히 사형선고를 내린다. 형과 무관하게 죄질에 대한 판결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영등위는 해당 영역에서 한 사회가 지켜야 하는 도덕적 기준의 상징인 셈이다.
영등위 일 년 동안 역지사지 심정으로 많은 것을 깨달았다, 고 하면 거짓말이고 다만 확신하게 된 것은 시스템은 두드려 패는 가격(加擊) 대상이 아니라 풍자와 골계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문화와 예술의 힘은 거기 있다. 힘만 있고 머리는 없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기도 하다.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바른사회 운영위원)
출처 - 조선일보 2013. 10. 5 남정욱 교수의 명랑笑說
<원문>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pdf_ReadBody.jsp?Y=2013&M=10&D=05&ID=2013100500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