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유감표명 '유감' - 박효종
	2003-08-20
대통령 유감표명 '유감' 보수우익단체들이 주도한 8.15행사에서 김정일 초상화를 찢고 인공기를 불태우는 일이 벌어지자 북한은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 불참을 시사하면서 정부 차원의 재발방지와 유감표명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통일부는 곤란하다는 입장이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이에 선뜻 응했다. 우리는 이 유감표명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성조기의 무게와 인공기의 무게를 동일시한 나머지 나온 이 유감표명은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가치관 혼란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물론 유니버시아드대회 성공이나 남북교류 활성화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소중히 해야 할 원칙과 가치를 지키는 일이다. 보수단체는 격앙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올해 들어 벌써 세번에 걸쳐 대규모 반핵-반김정일 시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동안 가만히 있던 보수단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정부가 대북포용정책을 추진하면서 우리의 영혼까지 팔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그동안 보수층은 김대중정부에서 추진한 대북 햇볕정책에 대해 반신반의하면서도 이를 대승적 견지에서 받아들인 것이 사실이다. 북한이 변하지 않은 게 냉전시대의 대북 강경책 때문이라는 진보주의자들의 비판으로부터 비롯된 반성도 있었고, 또 포용정책을 하면 북한이 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변한 것은 북한이 아니라 오히려 남한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구심을 갖게 됐다. 미군 장갑차에 의해 목숨을 잃은 꽃다운 소녀들의 이름은 생생하게 기억하면서도 월드컵 당시 서해교전에서 북한군의 총탄에 의해 산화한 꽃다운 군인들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는 이 엄청난 모순, '새마을 정신'은 잊어버린 지 오래인데 '만경대정신'을 본받자는 구호가 나오는 현실, 안보동맹국인 미국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토로하는 반면 북한에 대해서는 정겨움을 표현하는 일단의 정서. 북한의 인권문제는 천하가 알고 있는데도 인권문제만 나오면 북한이 '몽니'를 부릴까 봐 북한의 인권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며 쉬쉬하는 분위기. 그뿐만이 아니다. 햇볕정책의 이름으로 그렇게 많은 돈을 쏟아붓고 굴지의 대기업 하나가 거덜났는데도 돌아온 것은 핵위협이었다. 김대중정부 때 햇볕정책으로 말미암아 전쟁위협이 사라졌다는 자화자찬의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또다시 한반도에서 전쟁의 발발을 두려워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지금 한반도는 구한말의 비극적 상황처럼 세계 열강이 '감 놓아라 배 놓아라'하며 간섭하는 무대가 됐다. 6자회담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북한은 우리가 준 돈으로 주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할 생각은 하지 않고 왜 몰래 핵을 개발해서 외세를 끌어들이는가. 이 수수께끼 같은 현실에 대한 보수의 울분과 눈물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이들의 눈물은 보수가 아니면 안된다는 '꼴통보수'의 눈물이 아니며 반공시대를 그리워하며 과거로 돌아가자는 꼴불견의 하소연도 아니다. 탈냉전도 되고 동포애도 발휘할 만큼 했는데 왜 김일성시대나 김정일시대가 똑같냐는 말이다. 동구와 소련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역사의 종언'이 도래했는데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안보와 정체성이 무너질까 봐 대낮에 시위를 벌여야 한다는 절망감이야말로 인공기를 찢은 이유다. 인공기를 찢고 김정일의 초상화를 불태운 그들의 행위가 극단적인 행위라고 해도 이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을 감안할 때 성조기를 불태운 행위와 인공기를 불태운 행위가 어떻게 같은 것으로 평가받아야 할까. 이번에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유감표명을 하며 재발방지를 약속함으로써 앞으로 보수주의자들의 궐기대회는 원천봉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우리가 북한의 남한 길들이기에 말려들어야 할까. 인권선진국인 우리가 인권후진국인 북한을 길들여도 시원치 않은데 북한이 우리를 길들이다니…. 이것이 대통령의 유감표명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이유이다. 朴孝鍾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 시민회의 정책위원장) 출처 - 세계일보 2003. 8. 20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