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기 유감' 표명은 경솔 - 제성호
	2003-08-20
'인공기 유감' 표명은 경솔 내정간섭에 저자세라니 …체제존중도 상호주의로 노무현 대통령은 19일 국내 보수단체가 지난 8·15 집회에서 북한의 인공기와 김정일 국방위원장 초상화를 불태운 데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그러한 유감표명이 과연 적절한 조치였는지는 의문이다. 우선 노 대통령이 나선 것은 격이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북한은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대변인 성명을 통해 이른바 자신의 체제모독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 이 같은 북측 반관반민기구의 요구에 대해 우리의 최고통치권자가 유감표명으로 화답했다. 앞으로 남북관계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때마다 대통령이 직접 사과 또는 유감을 표명하는 것은 올바른 남북관계 형성·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만일 이번에 유감을 표명하는 것이 적절했다고 하더라도 통일부장관이나 민화협 의장 등의 선에서 대처하도록 했어야 했다. 유감표명은 잘못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잘못이 없었다면 유감의 뜻을 밝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인공기나 초상화를 태우는 것이 우리 실정법상 위법한 행위인가가 문제로 될 수 있다. 인공기는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로 간주되는 북한의 체제상징물(이적표현물)이다. 또한 김정일 위원장은 아직까지도 엄연히 반국가단체의 수괴이다. 보수진영의 행동에 다소의 과격성(?)이 있을지라도 거기에는 북한주민의 인권을 탄압하면서도 핵무기 개발을 강행하는 북한정권에 대한 비난과 우국충정의 뜻이 담겨져 있다. 그것은 헌법상 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호되어야 할 영역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유감의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 논란이 될 수 있다. 이번 유감표명은 북한의 내정간섭이 계속 되풀이되고 있는데도 우리 정부가 대북 저자세로 무르게 대응한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그 동안 북한은 걸핏하면 우리 정부관료의 발언, 야당의 입장, 언론기사, 실정법(국보법 등)과 대북정책(예: 한·미공조, 주적론 등)에 대해 비난하면서, 수정 또는 사과를 요구해 왔다. 이는 남북기본합의서 제2조에 명시된 내부문제 불간섭 의무에 대한 중대한 위반을 구성한다. 이번 북한의 사과요구도 내정간섭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우리 정부의 길들이기와 보수진영의 고립화·무력화를 기도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북한측이 남북관계를 볼모로 한 무리한 대남요구까지도 덥석 수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유감표명시 북한의 내정간섭 중단, 남북 간 합의사항(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 참석, 4대 경협합의서 문본 교환) 의 일방적 파기 내지 연기에 대한 공식 사과를 북측에 요구했어야 했다. 노 대통령은 과거 성조기가 불태워졌을 때 우리 정부가 유감의 뜻을 표명한 선례가 있음을 들어 이번 대북 유감표명도 적절한 조치였다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양자는 본질이 전혀 다른 것이다. 현행법상 이적단체인 한총련이 미국의 성조기를 불태우는 행위는 형법 제109조(외국 국기·국장모독죄)의 위반이 된다. 그러나 반국가단체의 인공기는 본조의 적용(보호) 대상이 아니다. 대통령은 과도기적 이중성이 혼재하는 특수한 남북관계를 감안해서 우리 시민단체의 행동에 대해 북한이 보인 과민반응에 보다 의연하게 대처했어야 했다. 그리고 북측의 유니버시아드대회 참가는 세계와의 약속 이행이라는 차원에서 접근, 북한당국의 태도변화를 모색했어야 했다. 만일 앞으로도 대북 저자세로 남북교류 성사에 급급할 경우 더욱더 중요한 우리의 국익과 명분, 즉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훼손시킬 수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이번 사건은 남북화해·협력시대에 있어서 남북 간의 체제인정·존중문제를 다시금 제기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통일부장관의 대북성명을 통해 다음 남북장관급회담에서 체제인정·존중의 내용 및 범위, 추진방법의 문제를 협의·해결할 것을 제안해야 한다. 남북간 체제인정·존중은 마땅히 상호주의와 대등성에 입각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언론과 시민단체의 적법한 표현(악의적인 비방이 아닌 정당한 비판·비난)의 자유를 부당하게 위축시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제성호 (중앙대 법대 교수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조선일보 2003. 8. 20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