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구석 무너지는 사회 - 이훈구
	2003-06-19
구석구석 무너지는 사회 요즘처럼 불안하고 답답하고 막막한 때가 있었을까. 노사투쟁, 각종 이해집단 간의 주도권 잡기, 제몫 찾기로 나라가 온통 시끌벅적하다. 어디 그뿐인가. 국가경쟁력은 붕괴되고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당시보다 경기가 더 얼어붙었다. 기업이 속속 폐업하고 취업의 길이 막힌 지가 오래다. 국민경제가 암담하고 불안하다. 경제뿐만 아니라 민생치안조차 흔들리고 있다. 부녀자를 납치, 몸값을 받아내고 그것도 모자라 인질을 살해했다. 최근 강남의 학부모들은 자녀의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로 몰려간다. 자녀를 안전하게 귀가시키기 위해서다. 언제부터 우리의 치안이 이 지경이 되었는가. 한동안 뜸했던 조폭들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다. 그 동안 수감됐던 조폭들이 속속 출옥했기 때문이다. 조폭이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시장에서 날뛰기 때문에 선량한 사업가가 장사할 의욕마저 상실한다. 뿌리가 굳건했던 우리의 가정마저 뒤흔들리고 있다. 카드 빚 때문에 부모를 구타하고 누나 집을 턴다. 자녀의 엄청난 카드 빚 때문에 충격을 받고 부모가 자살한다. 언제부터 한국의 젊은이들이 이렇게 사치하고 무절제했는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기성세대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한국 사회가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민심이 흉흉하고 불안하다. 보다 못한 노무현 대통령이 각료를 불러들여 민생치안 확보, 그리고 조폭과의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요즈음의 격렬한 노조 투쟁은 우는 아이 젖주기 식으로 안이하게 대처한 정부의 자세 때문이다. 이렇게 제몫 찾기에 연연하다가는 드디어 밥그릇마저 깨버릴 수 있다는 논리를 그들은 알고나 있을까. 왜 외국 기업이 한국에 투자하기를 꺼리겠는가. 강성 노조 때문이고 한국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조직폭력배가 다시 힘을 얻고 있는 것은 그동안 폭력을 미화한 우리 사회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이들을 엄격히 통제하지 못한 사법 당국에 그 책임이 있다. ‘모래시계’ ‘친구’ ‘야인시대’와 같은 영화와 TV드라마가 히트를 함에 따라 청소년 사이에서는 조폭 세계를 동경하는 풍토마저 생겨났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한국 영화계의 폭력 미화 현상을 비꼴 정도다. 최근 유괴사건의 기승은 우리 신용카드 회사의 잘못된 경영, 그리고 우리 경제의 급격한 하강과 관련이 있다. 김대중정권 말기에 신용카드 회사가 경쟁적으로 무분별하게 회원을 모집한 후유증이 지금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카드빚을 진 사람은 신용카드 회사로부터 밤낮으로 시달림을 받는다. 어떤 경우에는 심한 인격적 모욕까지 당한다. 이를 모면하기 위해서 신용카드 채무자들은 극단의 방법까지 강구한다. 만일 이들이 카드빚을 갚지 못하면 신용불량자로 낙인된다. 현대사회는 신용사회다. 신용불량자가 현대사회에서 발붙일 곳은 아무 데도 없다. 한국의 신용불량자가 수백만이고 이들의 빚이 수십조원이라 한다. 이들의 카드빚은 한국 경제의 걸림돌이기 전에 한국의 치안을 위태롭게 하고 가정을 뿌리째 흔들 시한폭탄이다. 따라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신용카드 회사와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선량한 카드빚 채무자를 선별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의 빚을 장기채무로 바꿔주어야 한다. 즉, 이들이 직업을 갖고 돈을 벌 수 있을 때까지 그 채무를 연장해 주어야 한다. 정부와 신용카드 회사는 더 이상 신용불량자를 양산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부모들도 자녀의 신용카드 사용을 엄격히 통제해야 하며, 청소년으로 하여금 어렸을 때부터 검소하고 건전한 소비 행동을 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조폭과 범죄에 대한 사법 당국의 응징도 그 강도를 더 높여야 한다. 미국에서는 유괴사건 발생시 연방수사국(FBI)이 자동적으로 개입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유괴사건의 경우 돈에 궁한 사람이 쉽게 저지를 수 있는 범죄다. 그리고 피해자 및 그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심한 상처를 남기는데다, 유괴범은 반드시 체포되고 만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만 이 사건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병이 들었고 그 병은 중증이다. 지도자 한 사람이 이 병을 고치기에는 너무 만신창이다. 국민 모두가 구국의 신념으로 이 병의 치유에 앞장서야 한다. 이훈구 (연세대 사회심리학 교수 / 시민회의 일하는복지사회운동본부장) 출처 - 문화일보 2003. 6. 19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