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정부는 `법적권위` 회복을 - 박효종
	2003-06-03
盧정부는 `법적권위` 회복을 한번 흐른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꼭 1년전의 월드컵은 꿈만 같았다. 너나 할 것 없이 한 마음이 되어 ‘대~한민국’을 외쳤다. 이겨도 울고 져도 울었던 그때는 2030세대도 5060세대도 없었고 진보와 보수도 없었다. 4강 신화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우리도 화합할 수 있다”, “화합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통합에 관한 체험이었다. 1년 후 우리의 자화상은 어떤가.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고 했던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시시포스가 애써 산 정상에 올려놓은 돌이 제 무게를 못이겨 땅으로 곤두박질친 것 같은 느낌이다. 새 정부도 출범했는데, 현실은 정치적 균열, 이념적 균열, 세대간 균열 등 분열과 혼란, 갈등뿐인 것 같다. 개혁신당을 만들겠다는 신주류와 민주당을 고수하겠다는 구주류는 기세싸움을 넘어 막가파식 갈등에 접어들고 있다. 대선에서 강적인 한나라당을 물리치고 역전승을 했는데, 승리의 환희는커녕, 갈등과 다툼의 소리만 요란하다. “유혈이 낭자하게 싸우겠다”는 전사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한나라당은 당대표를 뽑고 새 출발을 다짐하고 있지만, 아직도 대선패배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말과 행동마다 “이길 수 있었는데 졌다”는 패배의식이 배어 있고, ‘청와대 자리가 우리 자린데, 주인이 바뀐 것은 아닌가’하는 심각한 도착증세에 사로잡혀 있다. 정치를 스포츠와 비교하는 것은 정치인을 ‘잡초’와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부조리한 일일 터이다. 한편 정치나 스포츠나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또 선수와 관중이 나뉘고 경쟁이 치열한 것도 다를 바가 별로 없다. 그런데 스포츠에서는 한 마음 한 뜻이 될 수 있는데 비해 정치에서는 갈라지고 찢어지고 있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참여정부 출범 100일이 가까운데, 월드컵 축구처럼 통합의 정치는 있는가. 통합의 리더십은 있는가. 그동안 힘에 부치는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정부나 정치공동체에 과부하가 걸릴 지경이다. 북핵문제나 이라크전쟁 등은 그 외생적 요인 때문에 이에 대한 대처에 우왕좌왕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해집단의 요구나 시위에 정부가 쩔쩔매며 매번 ‘정치적 결단’을 내리는 모습이 안쓰럽다. 최근 이익집단들의 요구나 시위가 격렬해졌지만 과거정부와 비교하여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다만, 이에 대처하는 시스템과 리더십이 부실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을 뿐이다. 무릇 정부가 행사할 수 있는 권위 유형은 막스 베버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다양하다. 한국 사회는 민주화가 된 이후에도 막강한 제왕적 권력에 휘둘렸다. 참여정부는 이러한 제왕적 권력이라는 ‘전통적 권위’와 결별하고자 애쓴 기색이 역력하다.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고 ‘토론공화국’을 선포했으며 당·정분리를 약속했다. 서열을 파괴한 파격의 조각과 검사들과의 대화도 신선했다. 하지만 전통적 권위를 탈피한 탈권위주의적 국정 운영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제왕적 권위를 포기한 것은 반길 만한 일이지만, 그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탈권위주의라고 하여 무권위나 무질서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제왕적 권위는 마땅히 법적·합리적 권위로 대체돼야 하는데, 이 점에 있어 참여정부는 성공적이었는가.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많은 정책적 혼선들은 바로 이 법적·합리적 권위가 결여돼 초래된 사태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화물연대파업이나 한총련 기습시위,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에서 정부가 갈팡질팡하는 사이, 법적·합리적 권위의 부재가 크게 느껴지고 사회갈등만이 증폭되는 기이한 현상이 생겼다. 각종 파업을 ‘정치적 방식’으로 푸니 다른 사회집단들도 형평성을 부르짖으며 시위에 나선다. 전교조가 사생 결단식 집단 행동을 하겠다고 하여 기존의 방침을 뒤엎으니, 교장단이나 교총 등이 정책불복종을 선언하게 된다. 물론 100일은 국정평가를 하기에 짧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데도 상당한 준비가 필요하지 않은가. 하지만 100일은 앞으로 5년 국정 운영의 지표와 표본도 될 수 있다. 참여정부는 제왕적 권위를 내던지는 데 과감했지만, 법적·합리적 권위를 행사하는 데 인색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통합과 조화보다 편가르기 시위와 집단이기주의를 부추기지 않았나 생각된다. 월드컵 1년과 참여정부 출범 100일을 앞두고 스포츠와 정치가 다르다는 것보다 같은 점이 많다는 것을 확인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박효종 (서울대 정치학 교수 / 시민회의 정책위원장) 출처 - 문화일보 2003. 6. 3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