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해야 할 재벌개혁독선 - 조동근
	2003-04-24
경계해야 할 재벌개혁독선 참여정부 출범 후 숨고르기에 들어갔던 재벌개혁이 다시금 수면위로 부상하고 있다. 공정위는 4월 초순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투명, 독립경영, 공정경쟁체제”가 확립될 때까지 재벌개혁을 원칙대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제시된 재벌개혁의 큰 틀은 출자총액제한 강화, 재벌금융계열사 규제강화, 그리고 엄격한 지주회사제를 통한 지배구조개선 등이다. 한마디로 규제강화를 통해 재벌에 대해 전방위적 압박을 가하겠다는 것이다. 이같은 재벌개혁의 강공드라이브 이면에는 재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짙게 깔려있다. 일부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총수중심의 불투명한 경영과 지배권 세습, 불공정경쟁이 상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5년간의 구조개혁에도 불구하고 아직 재벌은 공정위가 지적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문제인식이 기업을 보는 눈의 전부는 아니며, 명분과 구호가 개혁을 추동시키는 것도 아니다. 개혁은 ‘자발적 변신’을 유도하는 섬세한 기술이다. 영국의 빅뱅(big bang)식 개혁을 주도한 것으로 평가받은 대처(Thatcher) 수상도 개혁을 “셀라미를 얇게 썰어 샌드위치에 끼우는 섬세한 기술”로 묘사한 적이 있다. 과거에 명분과 선의(善意)로 무장된 개혁이 별로 성공적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개혁이 설계주의와 이상주의에 포획되어 개혁만능과 개혁독선의 부작용을 빚었기 때문이다. 개혁독선은 “나는 옳기 때문에 상대방만 변하면 모든 것이 풀린다”는 식의 정책사고를 갖게 한다. 과거 국민의 정부, 재벌의 ‘IMF위기책임론’도 이같은 맥락에서 나온 발상이다. 참여정부의 재벌의 ‘변칙과 반칙론’도 예외는 아니다. 상대에게 책임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 개혁은 아니다. 상대방이 변하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개혁이다. 공정위는 재벌의 변칙과 반칙이 교정되면 공정한 시장경제질서가 구축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여야 맞다. 개혁을 통해 법치주의를 확립하고 정부와 시장의 관계를 정상화해 시장규율이 작동되면, 변칙과 반칙을 일삼는 기업은 경쟁과정을 통해 도태된다. 국민의 정부이래 기업개혁은 ‘모범답안’을 외과수술식으로 이식(移植)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기업에 메스를 가해 “정형화된 기업미인”을 만드는 것이 개혁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개혁이 이상주의와 설계주의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다. 개혁은 각 개체가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따라서 재벌개혁은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현존하는 사회현상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주지하다시피 재벌은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개발년대적 상황 하에서 생성되고 진화해 온 기업조직이다. 물론 자생적 기업조직으로서의 재벌이 그 자체로서 최선일 수는 없으나, 경쟁과정에서 살아남은 것은 나름대로의 효율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재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재벌의 ‘자율적 변신’에 대한 운신의 폭을 줄일 뿐이다. 재계가 참여정부의 재벌개혁에 대해 힘겨워하는 것은 개혁의 속도와 강도만은 아니다. 기업은 시장기회를 포착해 수익을 창출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기업은 생존하지 않고서는 성장할 수 없기 때문에, ‘경영권 방어’는 기업의 당연한 경영행위이다. SK그룹이 워커힐호텔과 SK주식 맞교환을 시도한 것도 사실은 SK그룹의 지주회사격인 SK의 경영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배임혐의에 의한 SK회장 구속은 투기적 외국자본에게 SK지배구조와 규제체계의 빈틈을 보여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구체적으로 SK회장의 구속으로 워커힐호텔과 SK주식 맞교환이 원상 회복됨에 따라 총수의 SK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더욱이 출자총액제한으로 SK C&C가 보유한 SK지분에 대한 의결권이 상당부분 제한된 상황에서, SK에 대한 투기적 외국자본의 공격은 예견된 것이다. 우연히 크레스트 증권일 뿐이다. 재계 3위 자산규모 47조의 SK그룹을 공격하는 데 투입된 자금이 불과 1천7백억원 정도였다는 사실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기업은 그동안 국내기업에 불리한 역(逆)차별적 규제로 인해 외국기업과 외국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에 과다하게 노출되어 왔다. 출자총액제한과 금융기관의 계열사보유지분에 대한 의결권제한 규제가 대표적 사례이다. 이러한 의결권제한은 글로벌 경쟁환경하에서 외국기업에 반사적 이익을 안겨주는 ‘역차별’이었지만 그 위험 요소에 대한 충분한 정책인식이 뒤따르지 못했다. 규제당국과 소액주주운동을 주도한 시민단체가 우리 기업의 지배권을 난공불락의 ‘철옹성’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규제당국은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경제력집중 억제라는 명분으로 기업지배권을 제약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두었다. 이때 기업지배권과 경영권 방어능력은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에 기업지배권 제약은 경영권 방어능력의 저하를 의미한다. 따라서 SK사태는 역차별의 위험요소에 대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지주회사제는 재벌의 지배구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씻어냄으로써 재벌을 음지(陰地)에서 양지(陽地)로 나오도록 하는 유효한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지주회사제도는 그 기준이 너무 엄격하다. 공정위는 기준요건을 완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다. 이는 지주회사를 재벌총수의 은신처로 생각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까다로운 조건을 정해 놓고, 지주회사 설립을 유도하는 것은 일종의 정책유희다. 따라서 지주회사로의 전환요건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지주회사가 재벌지배구조 개선의 모범답안이 아닌 만큼, 지주회사로의 전환은 기본적으로 기업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기업은 여건변화에 자기 합리적으로 반응하는 생물이며, 경영권 방어는 글로벌 경쟁환경 하에서 ‘계속기업’(going concern)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또한 상황적 지식과 현장지식은 정책당국보다 기업이 훨씬 정통하다. 따라서 기업개혁은 기업의 생리를 이해하고 현장지식에 기초한 기업의 의사결정을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기업의 제도적 여건을 시장정합적(市場整合的)으로 정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시장의 경쟁규율 만큼 기업의 자율적 변신을 압박하는 장치도 없다. 설계주의와 이상주의에 경도된 참여정부의 재벌개혁을 우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 시민회의 경제제도연구센터 소장) 출처 - 자유기업원 2003. 4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