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강이 뭐 길래 - 한영탁
	2002-05-03
16강이 뭐 길래 세계인의 축구 향연 한.일 월드컵대회가 이제 개막일을 한 달도 덜 남기고 있다. 오는 5월 30일부터 한 달간 전 세계 수십억 축구 애호가들의 눈과 귀가 한국과 일본의 20개 구장에서 나눠 열리는 월드컵 경기에 쏠리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월드컵 조직위는 막바지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의 10개 개최 도시는 저마다 외국에서 몰려들 축구팬들의 숙박, 교통 대책을 최종 점검하고 가로 정비 등에 바쁘다. 자원봉사자들의 훈련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만약의 테러나 월드컵 경기 때면 으레 따르는 훌리건들의 난동에 대처하기 위한 군경의 대비책도 마련된 것으로 전해진다. 온 나라에 월드컵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하지만 우리 땅에서 열리는 월드컵이 성공적으로 끝날지 걱정도 태산 같다. 한국의 국가적 이미지를 세계에 다시 부각시키고 월드컵이 가져올 경제적 이득도 알차게 걷어 들일 수 있어야 할 터인데 걱정이다. 하기야 100개국 이상이 출전한 올림픽을 거뜬히 치러낸 나라가 아닌가? 그런데 32개국이 출전하여 한. 일 두 나라에서 챔피언의 자웅을 겨룰 월드컵이야 멋지게 치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귀가 따갑게 들어야 하는 16강 타령이 그것이다. 온 국민이 월드컵 16강 진출에 목을 매고 있는 듯한 절박한 느낌이다. 텔레비전과 방송에 월드컵 얘기만 나오면 16강 진출 얘기부터 시작된다. 종교단체들이 월드컵 성공 개최를 비는 종교행사에서도 16강을 기원한다. 광고에도 16강 기원이 들먹여진다. 월드컵 본선에 번번이 출전하고서도 16강 진출은커녕 1승도 올리지 못한 우리 처지이고 보면, 우리 땅에서 열리는 대회에서 16강 진출을 목표로 잡은 시민들의 애타는 염원을 탓할 수도 없다. 하지만 16강에 들지 않으면 나라가 절딴 나기라도 하는 것 같은 지나친 분위기는 못마땅하다. 우리 마당에서 벌어지는 세계인의 꿈의 축전을 멋지게 치러서 우리의 국민적 저력을 보여주면 될 일이지 굳이 16강에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는 없다.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주최하고 그렇게 염원해온 16강 진출 염원도 이루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하지만 온 국민을 16강에 올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지금의 분위기는 건전하지 못하다. 실패했을 경우에 느끼게 될 실망과 좌절과 허탈감을 생각하면 정말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분명 축구는 미국과 캐나다 등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 전 세계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스포츠이다. 이 세계적인 축구 사랑 열기에 동참하는 것은 지구촌 시대의 세계와 호흡을 같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세계화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이 축구 강국도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월드컵이 우리 땅에서 열리니까 내친 김에 16강도 되어보자고 대회에 임박하여 기원하고 용만 쓴다고 될 일이 아니다. 16강을 외치는 사람들 중에 평소에 축구장 문밖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이 허다할 것이다. 우리나라 프로축구 경기장의 썰렁한 관람석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중.고교 축구 경기장의 텅 빈 관람석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축구 강국이 되려면 유소년 축구부터 올바르게 기본기를 닦은 선수층이 두터워야 한다. 미국의 동네마다 공터에서 열리는 수많은 리틀 리그가 없다면 오늘날 미국의 야구가 국민적 스포츠로 사랑받지 못할 것이다. 일본의 수많은 유소년 축구 클럽들이 없었다면 일본 축구가 이제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 기량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제대로 기본부터 닦아 놓고 16강이던 우승이던 바라는 게 순서가 아닐까? 그런데 하물며 행여 16강에라도 오르기를 기다려 정치판 새로 짜기라는 불순한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고 노리는 지도자들도 있는 듯하니 한심하다. 승패를 떠나서 스포츠를 스포츠로 즐기는 문화적 성숙이 아쉽다. 우리가 문화 국민으로 세계의 스포츠 잔치를 멋지게 치를 수 있기를 바란다. 한영탁 (전 세계일보 논설위원 / 시민회의 바른언론포럼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