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파병, 그리고 국익 - 정진영
	2003-04-04
이라크파병, 그리고 국익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일 국회에서 행한 국정연설에서 이라크 파병 동의안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면서 몇가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의 중책을 맡으면서 정치인 노무현에게 일어난 인식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첫째, 노 대통령은 "오늘날 국제정치의 현실은 유감스럽게도 명분론보다 현실론이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역정을 들어가며 자신이 명분을 중시해온 정치인임을 애써 강조했다. 그렇지만 그는 "대통령이 된 지금, 나라와 국민의 운명이 달린 결정을 함에 있어서 명분보다 현실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자신의 선택이 자신이나 동지들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에 그쳤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의 결정은 국가안보와 국민 전체의 생활에 직결돼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통령으로서의 책임의식과 현실인식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둘째, 북핵 위기의 해법과 관련하여 노 대통령은 이라크전에 대한 우리의 미국 지지가 미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 증대를 가져올 수 있다는 한미 공조론을 수용했다. 한미 공조는 단순히 한국이 미국의 입장에 끌려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려운 미국을 지지하는 것이 미국의 한국 입장에 대한 존중을 끌어낼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노 대통령은 "미국이 한국의 동의없이 북핵문제를 일방적으로 처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라크전 지지와 북핵문제 해법 사이의 이른바 '빅딜설'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미국이 북핵문제 해법을 명분에 따라 결정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현실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미국에 대한 영향력은 반전이라는 명분이 아니라 미국 지지라는 거래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다는 인식이다. 셋째, 노 대통령은 당선 이후 짧은 기간 동안에 한미동맹과 한국경제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연관성을 현실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 같다. 그는 많은 투자자들이 전쟁의 위험보다는 한미관계의 갈등을 더 큰 불안요소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란 것처럼 보인다. 그는 "파병 결정이 이들의 불안을 해소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해외투자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한미동맹은 한국의 안보를 보장하는 지주이고, 한국 경제는 이러한 안보를 바탕으로 작동하고 있다. 국가안보에 대한 의구심은 투자자에게는 심각한 리스크다. 굳건한 한미동맹은 외국투자자들에게 한국의 안보를 확신할 수 있게 해주고, 북한의 위협이 파국으로 치닫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파병을 둘러싼 심각한 국론분열이 일단 진정국면으로 들어설 전망이다. 물론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반전, 파병 철회의 움직임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파병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모두가 국익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대통령의 결정과 국회의 동의로 확정된 대외정책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전쟁을 반대하고 미국의 일방주의적 대외정책을 싫어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현실이 이 문제를 두고 더 이상 국론분열이 계속되는 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지적처럼 대등한 한미관계는 국민의 생존이 안전하게 보장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우리의 국가안보와 경제 형편이 미국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에서 대등한 한미관계를 위하여 국민의 생존을 위협하는 결정을 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이제 우리는 파병을 둘러싼 찬반으로 헝클어진 감정과 분열된 국론을 수습하고, 파병 결정이 우리의 안보와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때이다. 鄭璡永 (경희대 국제관계학 교수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세계일보 2003. 4. 4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