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진보’인가 - 김병주
	2003-03-04
누가 ‘진보’인가 60년대 초 이래 가장 큰 물갈이가 요즘 진행 중이다. ‘진보’의 기치를 앞세운 신세대의 진출 앞에 구세대가 무기력하게 퇴장을 강요받고 있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사회에 세대교체는 자연스럽고 반가운 일이다. 그래야 사회가 변화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문제는 어디로 가는 것이 진보인가에 있다. 고대인들에게는 ‘진보’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초에 낙원에서 추락한 인간들은 비록 기술적으로는 진보하지만 도덕 적으로 퇴보한다고 보았다. 잃어버린 태초의 낙원으로 회귀하는 꿈을 추구하기 위해 미래에 등을 돌리고 과거를 바라보고 사는 것이 지혜였다. 기원전 5세기 데모크리토스(BC 460~360?)처럼 인간이 이성의 힘으로 짐승의 단계를 벗어난다고 본 예도 있지만, 헤로도투스(BC 484~425?)처럼 인간의 통제 불가능한 감성적 요인때문에 진보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게 마련이고 주기적 반복현상이 나타난다고 보는 견해가 그리스와 로마시대는 물론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배해왔다. 인간사회가 지속적으로 진보한다는 자신감은 17세기 이후 갖가지 발명·발견 덕분에 잔뜩 부풀어 오르기 시작해 18세기 말경 계몽주의 사상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프랑스 사상가 A 콩트(1798~1857)등은 미래에 인간의 완전함과 이상사회의 도래 가능성을 낙관했다. 영국의 역사가 J B 베리(1861~1927)는 인류 역사를 진보의 역사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던 자신감이 20세기 두 차례 세계대전의 광란을 경험하면서 다소 진정되긴 했지만, 오늘날도 급속한 과학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진보사상은 퇴색되지 않고 있다. 어디로 가는 것이 진보인가? 태초의 실락원(失樂園)인가, 원시공산사회인가? 마르크스(1818~1883)주의자들에 따르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 증대와 인간에 대한 인간의 통제 감소가 진보의 핵심이라고 본다. 이를 위해서 생산력 증대, 사회관계 변화(노동계급의 해방 등), 사유재산제 철폐 등을 통해 사회가 일정한 운동법칙에 따라 진보하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며, 어느 개인, 어느 계급도 이 운동을 멈추거나 방향전환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거창한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자본주의도 크게 바뀌었다. 한편 모든 생물의 진화론을 주장한 다윈(1809~1882)은 자기이론의 확대해석을 경계하는 입장이었지만, 그 후계자들은 생물학적 현상을 인간사회에 적용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경쟁적 투쟁을 해소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자연법칙을 간섭하는 것으로 배척했다. 이는 경쟁을 진보의 핵심이라고 보는 점에서 자유방임과 개인주의를 정당화하는 반면 사회는 유기체(생물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 구성원들은 중앙의 통제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의 뒷받침이 되기도 했다. 어찌되었거나 진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데 목표와 가치기준이 없을 수 없다. 21세기 초 우리 사회가 선택해야 할 기준은 무엇인가? 첫째, 정치·경제·사회 각 부문에서 국민 개개인의 창의력 발휘를 보장하는 자유와 민주주의, 둘째, 경제적 후생증대를 위한 지속성장, 셋째, 사회의 결속력 유지와 효율성 제고를 위해 약육강식 지양· 사회보장제도 확충, 넷째, 국가안보와 사회질서 유지, 다섯째,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국가로서 위상제고 등으로 간추릴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마구잡이식으로 개혁·반동, 진보·수구의 편가르기가 성행해 국력의 소모와 정서의 내출혈로 우리사회는 탈진하고 있다. 통일을 절대 선(善)으로 보는 것도 위험하다. 역시 자유 민주주의, 경제후생 확대 등의‘진보’기준에서 보아야 한다. 북한 곳곳에 산재한 수용소 군도에 수감된 사람들을 감싸 아우르는 것이 진정한 진보이고 통일이다. 이렇게 보면 연령, 직업, 계층의 구분 없이 누구도 진보일 수 있다. 입으로 진보를 말하는 사람이 퇴보일 수 있고, 통일을 노래하는 사람이 압제를 지원하는 퇴보자일 수도 있다. 떳떳이 내가 진정한 진보주의자라고 외치고 나서자. 金秉柱 (서강대 경제학 교수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조선일보 2003. 3. 4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