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치레 합의' 안된다 - 제성호
	2003-01-24
'겉치레 합의' 안된다 금강산 남북적십자회담 제3차 실무접촉에 이어 지금 서울에서는 제9차 남북장관급회담이 진행중에 있다. 또 평양에서는 22일부터 남북 철도-도로실무협의회 제2차 회의가 열리고 있다. 이같은 일련의 회담은 사실상 햇볕정책을 결산하는 마지막 남북대화라고 할 수 있다. 남북적십자 실무접촉의 결과 다음달 20일부터 금강산에서 6차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거행되고, 오는 4월부터 면회소 착공에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 같은 합의를 보면서 왠지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짐을 느끼게 된다. 이산가족 상봉이 아직도 정례화되지 못한 채 북한의 선의에만 기대야 하는 게 남북간 인도적 사업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2000년 6월의 면회소 건설에 관한 원칙합의에서 착공합의까지 무려 2년6개월이 걸려야 하는 남북관계 현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더욱이 이번 회담에서 북한은 이산가족 생사-주소 확인과 서신왕래 확대 및 6.25 행불자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 다시 협의하자는 태도를 보였다. 최대한 협상카드를 세분화하는 동시에 합의사항 이행도 가능한 한 지연시킴으로써 이산가족 문제를 고리로 '최대한 챙길 것은 챙기겠다'는 전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경의선과 동해선 연결을 위한 철도-도로 문제에 임하는 북한의 접근자세와 협상태도도 기본적으로 이산가족 문제와 다르지 않다. 북한은 끊어진 철도-도로 연결에 필요한 자재는 당연히 남한이 제공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남한이 그토록 원하는 사업에 북한이 '통크게' 호응해 주는 데 따른 당연한 대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북한은 철도-도로 연결을 위한 DMZ(비무장지대)내 지뢰제거 작업 및 남북관리구역 운영과 관련해서는 정전협정 무력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제9차 남북장관급회담은 우리 정부가 북한 핵문제의 '주도적 해결'을 천명한 가운데 열리는 것이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내외의 각별한 관심을 끌고 있다. 짚을 것은 짚고 따질 것은 당당하게 따지면서 북한 핵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위한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북한은 이번 회담에서 민족공조를 요구함으로써 핵개발 저지를 위한 한-미 공조를 약화시키려는 태세여서 우리 정부가 어떤 입장을 취할지도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이런 점에 비춰 정부는 '모양 갖추기'로 한두번 북한 핵문제를 거론한 후 종전처럼 남북교류협력에 치중하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된다. 만일 남북공동보도문에 북한 핵문제에 관해 '협의했다'거나 '해결을 위해 공동 노력한다'는 식의 겉치레 합의를 넣는 데 만족한다면 대다수 국민들을 실망시키게 될 것이다. 북한 핵문제는 민족의 생존권과 한반도 평화에 직결돼 있는 문제이니만큼 정부는 확고한 원칙을 갖고 회담에 임해야 할 것이다. 지난 5년간 햇볕정책의 추진으로 남북 화해-협력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군사적 긴장완화에는 남북합의문에 쓰여진 '화려한 말의 성찬'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따라서 금후에는 핵문제 등 군사문제 해결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사회와 문화교류는 뒷거래 없이 정당한 방법으로 추진하되 남북 쌍방향의 교류를 지향해야 한다. 또 남북공동보도문에 복사판 찍듯이 기(旣) 합의사항을 되풀이하는 관행은 시정해야 한다. '합의를 확인하는 합의'가 아니라 실천가능한 합의를 생산해야 한다. 그리고 합의한 것은 반드시 합의한 일자에 합의한 대로 이행하는 관행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남북한간에 진정한 신뢰가 쌓일 수 있다. 앞으로 새 정부는 보다 균형잡힌 대북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실질적인 남북관계 개선을 이룩하길 기대한다. 제성호 (중앙대 법대 교수 / 시민회의 회원) 출처 - 세계일보 2003. 1. 24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