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떨고 있다 - 김병주
	2003-01-15
기업은 떨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간부가 뉴욕타임스(NYT)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지향하는 목표는 사회주의적이다”고 말했다고 해서 인수위가 발끈하고 나섰다. 외유 중이던 본인이 급거 귀국해 사실무근이라 해명했지만 인수위는 당사자의 인책을 요구했다. 한국에서 정부와 기업 간 역학관계는 분명한 상하관계다. 전경련은 1961년 군사정변 직후 부정독재자로 몰린 기업인들이 대정부협력채널로 결성한 단체다. 민주화 이후‘시장경제’라는 시대에 들어와서도 권위주의 시대의 상하관계가 크게 변함이 없었고, 근래에는 회장 선출도 정부 눈치를 봐가면서 한다. 그러한 위치의 전경련이 월급쟁이 임원의 입을 빌려 그런 발언을 할 만한 배짱과 지략이 있었을까. 문제의 외신보도는 오보이겠지만, 요즘 한국 기업계의 골 깊은 의구심을 제대로 표출한 셈이다. 왜 기업들은 떨고 있나? 첫째로 새 정부의 기업 개혁의지의 강도 때문이다. 노무현 당선자는 재벌개혁을“자율적·점진적·장기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인수위측의 발언을 간추리면 금융회사 계열분리 청구제도, 증권관련 집단 소송제, 출자총액 한도제유지·강화, 상속·증여세 완전 포괄주의, 기업개혁에 중소기업 포함 조치 등으로 기업들이 몸을 사리게 되었다. 둘째로 새 정부에서 더욱 활발해질 시민단체의 움직임 때문이다. 현 정부하에서도 대기업에 대해 배임 등의 혐의로 소송을 제기하는 등 대기업들이 겪어온 속앓이가 더욱 고질화될까 걱정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올 봄에 새 정부의 정책자세를 시험하려는 노동계의 기세 싸움이 격렬할 것이며, 새 정부가 친노동·반기업 조치를 강요할 것으로 우려하기 때문이다. 넷째로 촛불시위등 반미운동이 미국의 반한감정을 촉발, 대미수출에 심각한 차질이 초래될까 우려하기 때문이다. 북한 핵문제와 반미감정은 자칫 한국 신용등급 판정에도 불리하게 작용하고 투자금 회수 가능성을 높게 한다. 이 같은 우려는 기업인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국민들도 공유하고 있다. 이것은 경실련,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출신들이 다수 인수위에 등용되고 그들의 돌출 발언이 빌미가 되었다. 그들은 분명히 개혁 성향이 상대적으로 강하고 분배에 대한 관심이 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곧바로 사회주의로 가자는 극단론자는 없어 보인다. 솥뚜껑 보고 자라로 알고 지레 겁낼 것이 없다. 기업인들은 지난번 대선 결과가 달랐더라도 추진해야 할 기업개혁 과제들이 크게 다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어느 누가 집권해도 대주주의 독식을 막고 전체 주주이익에 충실한 경영, 정경유착·분식회계 등이 없는 투명·공정한 경영, 직원을 기업의 동반자로서 받아주는 경영을 기피하는 기업은 생존·번영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어느 경제체제하에서도 생산하는 경제단위는 기업이다. 새 정부의 지향이 분배 우선이라 하더라도 성장이 있어야 분배할 게 있다. 기업이 국내에 머물러 활기찬 경제활동을 통해 지속적 경제 성장을 이끌어야 분배 몫이 늘어난다. 세계로 열린 시대에 기업은 이윤 극대화를 위해 좋은 조건을 찾아 해외 이주를 서슴지 않는다. 이미 오래 전부터 국내 기업환경이 악화되어 중국, 동남아 등지로 둥지를 옮기는 철새가 된 기업들이 줄을 이었다.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한국 수출시장 1위로 올라섰지만, 자동차·반도체 등 주력상품 시장이자 자본과 기술의 공여국은 역시 미국이다. 우리가 반미감정을 드러내면 상대가 반한감정이 없을 수 없다. 미국이 마음 먹으면 한국상품의 수출 길이 막히고 자본과 기술도입이 봉쇄될 수 있다. 이 경우 다수 기업부실·도산과 대량실업 발생이 불 보듯 뻔하다. 불안에 떠는 기업은 연구개발, 설비투자, 고용확대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정부 관료들도 인수위 위세에 주눅이 들었다. 이들 양자의 도움 없이 어떤 경제도 활성화될 수 없고 어떤 개혁조치도 좌초할 수밖에 없다. 기업이 불안을 떨치고 기를 펴고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성공하는 정부의 첫 걸음이다. 金秉柱 (서강대 경제학 교수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조선일보 2003. 1. 15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