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대통령 필요하다 - 류동길
	2002-12-20
경제대통령 필요하다 말 잔치로 시끄러웠던 선거전은 끝났다. 대통령 후보들이 쏟아놓은 말 대로라면 곧 좋은 세상이 온다. 하지만 경제가 어디 말대로 되는 것인가. 대선 분위기에 가려졌던 경제는 이제 어려움의 실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이는 새 대통령과 새 정부가 풀어야 할 과제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국내 100대 기업 최고경영자의 절반이 2003년에 경기 침체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경제성장률은 올해보다 둔화하고 물가 상승 압박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내년도 투자계획과 관련해서는 최고경영자의 76%가 투자 규모를 줄이거나 올해와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할 것이라고 답했다. 기업경영자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체감 경기를 말해 주는 대목이다. 우리는 그동안 경제 움직임에 눈감은 채 선거에 여념이 없었다. 내년의 경제 악재는 수두룩하다. 가구당 3000만원 수준까지 급증한 가계부채, 미국의 경기 침체와 이라크전쟁 가능성에 따른 세계 경제 여건의 악화, 국제 유가와 국내 물가 불안 등 위험 요인이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다. 이런 점만 잘 대처하고 극복하면 되는가. 그렇지 않다. 한국 경제의 근본적 어려움은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 경쟁력을 강화하지 않고서 버틸 길은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떤가. 세계 시장의 냉엄한 현실을 외면한 채 국민은 제몫챙기기에 바쁘다. 정치권은 그런 걸 부추겨 왔다. 눈덩이처럼 커진 가계 빚은 어느 날 갑자기 불거진 것이 아니다. 정부가 앞장서서 경기를 살리려고 소비를 부추긴 결과다. 정부는 다른 나라보다 성장률이 높았다는 걸 자랑했지만 그 대가는 가계 빚 증가로 나타났다. 경제엔 공짜가 없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 ‘지역·연고주의를 뿌리뽑겠다’ ‘사람을 제대로 쓰겠다’는 공약은 돈 드는 게 아니니 희망을 걸 수 있고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복지 증대 등 후보들이 쏟아놓은 수많은 공약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검토해야 한다. “어떻게”의 첫째 해답은 천문학적으로 들어가게 돼 있는 돈을 어디서 마련하느냐에 있다. 세금을 무한정 거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이미 공적자금으로 인한 국가 빚은 엄청나다. 그걸 우리 국민이 수십 년 동안 갚아 나가야 한다. 공약 사업이라고 섣불리 손을 대다가 의약분업과 같은 결과가 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좋은 일, 해야 할 일이 아무리 많아도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온 세금의 범위 안에서 해야 한다. 일자리 창출도 대통령이 하는 게 아니라 기업이 한다. 기업을 뛰게 해야 한다. 기업의 발목을 붙잡으면서 일자리를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 임기 5년은 결코 짧지 않다. 하지만 대단한 업적을 남기기에는 짧은 기간이다. 그러기에 좋은 사회, 좋은 나라를 만드는 기초를 다지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업적일 수 있다. 정권의 과욕은 국민을 고달프게 한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다음 정권은 환란(換亂) 조기극복,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조기졸업을 과시하려는 것과 같은 충동과 조급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제란 말의 성찬(盛饌)을 먹고 자라는 나무나, 하루아침에 갑자기 피는 꽃이 아니다. 오랜 기간 정성스럽게 가꾸어야 꽃봉오리를 맺는 나무요 꽃이다. 거름주고 보살피며 참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대통령 후보들은 무대에 선 배우나 다름없었다. 배우는 주어진 역할을 대본에 따라 충실히 소화하면 된다. 이제 공연은 끝났다. 대통령 후보는 몰라도 대통령은 무대에 선 배우일 수 없다. 무대에서 내려와 진면목을 보여야 한다. 인기 정책의 유혹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실현성 없는 공약을 남발한 것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예컨대 후보들 모두 ‘쌀 관세화를 유예하겠다’고 했다. 10년 전 “대통령직을 걸고 쌀 개방을 막겠다”고 호언하던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에도 분명한 입장 표명이 없었다. 세계의 움직임을 외면하면서 세계화를 말한 것과 같다. 이제는 경제다. 경제 성장도 복지 증진도 농촌 문제도 단번에 풀 수 있는 게 아니다. 새 대통령은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목표와 비전을 제시하라. 그런 바탕에서 국민 각계 각층을 설득하고 협력을 구해야 한다. 때로는 싸우면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한국 경제, 어디로 갈 것인가. 지금은 걱정과 기대가 교차되는 시점이다. 류동길 (숭실대 경제학 교수 / 시민회의 회원) 출처 - 문화일보 2002. 12. 19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