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일관성 왜 중요한가 - 한경구
	2002-12-14
원칙·일관성 왜 중요한가 이미 부재자 투표가 시작됐고 며칠만 있으면 차기 대통령이 정해진다. 누구를 찍을지 오래 전에 결정한 사람도 있고 아직도 망설이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1, 2위를 달리고 있는 두 후보 중 누가 나라를 이끌어가는 데 조금이라도 더 나을 것인가를 찬찬히 비교해본 사람은 매우 적은 것 같다. 선거가 마치 양자택일의 ○× 시험처럼 돼버렸다는 느낌이다. 아무개가 되면 나라가 큰일이 나기 때문에 반드시 다른 아무개가 돼야 한다고 한다. 양 후보 진영의 이야기를 절반쯤 에누리해 듣더라도 차기 대통령 때는 나라에 큰 일이 날 것만 같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아무개 후보도 매우 훌륭하지만 이러이러한 점에서 내가 조금 낫다"고 말하는 후보를 볼 수 있을지? 대통령은 막강한 자리 같지만 사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세상 일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어느 하나를 건드리면 엉뚱한 곳에서 뜻밖의 영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또 일부 사람에게 도움이나 기쁨을 주면 다른 사람들이 섭섭해하거나 분노하기도 한다. 예산과 시간과 관심은 항상 모자라는데 사람들의 요구는 끊이지 않고 또 기다려 주지도 않는다. 더구나 나라 일이란 몇 가지 정책이 주효했다고 잘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러저러한 일을 하겠다고 또 나라를 이렇게 만들겠다고 큰소리 치고 있지만 세상 일이 어디 그리 쉬운가? 대통령 자리에 앉아보면 얼마 전 우리 대학의 수시모집 면접에서 차기 지도자의 바람직한 자질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을 했던 일이 있다. 특정 인물을 의식한 때문인지 대부분의 수험생은 능력이나 정직 등 몇몇 덕목에 대해 언급했고, 면접위원으로서 좀 짓궂을 정도로 수험생들의 답변을 물고 늘어지는 질문을 추가로 던졌다. 그날 밤 몇몇이 과연 인터넷 시대의 수험생답게 전자우편으로 "교수님의 생각을 알려달라"는 형태로 정답을 물어왔다. 아직 입시절차가 진행 중이며 대부분의 면접 문제가 그렇듯이 "정답"이 없음을 주지시킨 후 "어떠한 덕목을 제시하는가"보다는 "어떻게 제시하는가"가 중요하다면서 자세한 이야기는 신입생 환영회 때 하자고 답변했었다. 물론 면접시험과 달리 현실정치에서는 "어떠한"과 "어떻게"가 모두 중요하다. 양 후보가 정책대결을 한다고는 하지만 최대한의 유권자를 잡기 위한 경쟁을 하다보면 서로 베낀 것 같은 공약이 점점 늘어나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가치관과 출발점이 다소 다른 것 같지만 한반도의 평화와 국민생활의 안정이라는 기본 목표가 크게 다르지는 않기 때문에 현실 여건을 감안해 가능한 대책을 찾다보면 정책의 우선순위와 내용이 종종 수렴하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리라. 행정수도 이전 문제도 커다란 쟁점인 것 같지만 서울로의 지나친 집중 방지와 지방의 균형 발전이라는 기본 구상이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는 '어떠한' 정책을 추진할 것인가의 문제 같지만 한 걸음 물러나 살펴보면 사실은 '어떻게'의 문제이기도 하다. 신나는 목표는 누구나 제시할 수 있고 아름다운 몸짓은 누구나 흉내낼 수 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양김(兩金)이 의욕적으로 시작한 개혁들이 추진과정에서 실패하고 왜곡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니 이제는 조금 현명해지고 싶다. 원래의 취지가 아무리 좋은 것이었다고 변명을 해보았자 우악스럽게 밀어붙인 교육개혁과 의약분업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측근들의 비리와 부패 또한 대통령의 권위주의와 한탕주의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국민을 위해 싸울 수 있어야 차기 지도자에게 정말로 바라는 것은 멋진 신세계의 청사진이나 듣기만 해도 즐거운 약속들이 아니다. 복잡하고 제약 많은 현실 속에서 쉽게 포기하거나 흥분하지 않고 차근차근 우리의 이상을 추구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금방 무슨 일을 이루지는 못하더라도 국민에게 허탈감이나 배신감을 주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나라가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국민이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정말로 용기가 필요하고 싸워야 할 때는 일어나 싸울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평소에 원칙과 일관성을 보여준다면 불확실하고 암담한 상황에서도 믿고 따를 수 있으리라. 한경구(국민대 문화인류학 교수 / 시민회의 회원) 출처 - 중앙일보 2002. 12. 14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