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길 후보와 민노당의 약진 - 정진영
	2002-12-09
권영길 후보와 민노당의 약진 대통령 선거운동이 시작된 이래 권영길 후보와 민주노동당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크게 높아지고 있다. 권 후보의 TV 토론이나 연설을 듣고 속이 시원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고, 민노당에 대한 호감과 지지를 표명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2000년 1월 ‘노동자·농민·빈민·중소상공인의 정당’임을 선언하면서 본격적인 ‘정책적 진보정당’으로 출범한 민노당이 예상 외의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민노당은 지난 6월의 지방선거 때 8.1%를 득표해 제3당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이 덕분에 민노당은 중앙선관위의 법정 선거자금 지원을 받으며 대선에 나설 수 있었고 한나라당·민주당 후보와 함께 당당히 메이저리그 TV토론에 참여하게 되었다. 국민들에게 민노당의 존재와 정책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요즘 민노당에는 당원과 권영길 서포터스가 급속히 증가하고 격려전화도 많이 걸려온다고 한다. 권 후보와 민노당의 이러한 성공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을까? 첫째, 외환위기 이후 지난 5년간 우리 사회에 일어난 변화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구조조정의 여파로 실업자와 빈민이 증가하고, 봉급생활자의 반수 이상이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들의 아픔과 외침을 대변할 진정한 진보정당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둘째, 친노동적 이미지를 갖고 출범한 김대중 정부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이다. 노동자와 농민세력은 김 대통령에게 상당한 기대를 갖고 있었고, 초기에는 정부의 위기극복 노력에 상당히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의 친노동적 이미지는 노동세력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내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노동자와 농민의 이익을 증진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셋째, 진보정당에 대한 국민 다수의 경계심이 크게 약화되었다. 공산권의 붕괴와 세계적 탈냉전, 그리고 한반도에서의 긴장완화가 국민 다수를 ‘적색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진보정당이 출현할 수 있는 이념적 공간이 마련된 셈이다. 넷째, 한국 정치에 있어서 ‘제3당 효과’도 권 후보와 민노당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지난 두 차례 대선에서 제3후보는 15~20%의 득표를 했다. 양대 정당에 싫증을 느끼는 상당수의 국민들이 존재하고, 이들은 제3당을 필요로 한다. 이번 대선에서는 민노당과 권 후보가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다섯째, 권 후보 개인의 매력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소위 명문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했고 신문기자로서 파리특파원 생활을 오랫동안 했다. 그는 대다수 국민의 피부에 와 닿는 교육·의료·주택 등 생활상의 문제해결을 위한 진보적 대안을 제시하면서도 아주 부드럽게 이야기한다. 이러한 그의 경력과 이미지가 진보세력에 대한 국민들의 막연한 두려움과 선입관을 바꿔 놓고 있다. 그러면 권 후보와 민노당의 이러한 성공이 실제 표로 연결될 것인가? 이 문제와 관련해 권 후보와 민노당은 두 가지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하나는 이념성과 대중성 사이의 딜레마이다. 지지율을 높이고 표를 많이 얻으려면 진보정당에 대한 중산층의 두려움을 없애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민노당이 갖는 진보적 성향의 완화를 필요로 한다. 지난 10월 브라질 대선에서 승리한 노동자당의 룰라 후보는 기업가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외국자본에 대한 입장을 바꾸는 변신을 했었다. 민노당 주장대로 한국정치를 합리적 보수와 진보세력의 대결구도로 바꾸기 위해서는 민노당이 스스로 대중적 지지를 받는 정당으로 발전해야 한다. 다음으로 유권자들의 사표(死票)기피 심리를 어떻게 막느냐는 문제이다. 유권자들은 자신의 표가 사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당선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권 후보는 이러한 심리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 “100만표를 얻으면 민노당의 정책을 실현하는 데 10년이 걸리고, 200만표를 얻으면 8년이, 300만표를 얻으면 6년이 걸린다”고 말했다. 1000만표 이상을 얻으면 당선될 수도 있고 내년에 당장 실현될 수도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권 후보의 약진은 이번 대선의 의미있는 관심사다. 우리 나라도 이제 정책적 진보정당을 가질 수 있는 토대마련을 위해 느려 보이지만 그래도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고 있다. 정진영 (경희대 정치학 교수 / 시민회의 바른정치운동본부장) 출처 - 조선일보 2002. 12. 9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