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나라 전체에 서광 비치소서 - 박효종
	2007-12-31
새해 나라 전체에 서광 비치소서 어느 새해나 밝고 둥근 해가 뜨게 마련이지만, 이번의 해는 유난히 더 밝고 더 둥근 것 같다. 왜 그럴까. 지난 12월에는 배를 뒤엎듯 사납기 짝이 없는 민심의 ‘쓰나미’가 대선을 덮쳤다. 여야 정권교체는 그 자체로 민주주의 공고화의 발전된 지표이고 또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그럼에도 각별한 의미가 느껴진다면, 좌에서 우로의 획기적인 방향 전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난류가 한류로 바뀌고 북풍이 동남풍으로 바뀌는 것을 떠올릴 만큼 거대한 변화이며, 10년간 왼쪽으로 무한질주하던 대한민국호(號)가 오른쪽으로 급선회하는 형국이다. 더구나 올해는 건국 60주년을 맞는 해가 아닌가. 60년 전 건국자들은 대한민국을 세우면서 자유민주주의가 꽃피는 ‘반듯한 나라’를 희구했는데, 이제 그런 꿈에 한 발짝 더 다가선 느낌이다. 열화와 같은 국민의 시대적 요구를 감안한다면, 새로운 시대정신이 나와야 한다. 시대정신이란 헤겔의 ‘절대정신’처럼 저 높은 곳 어디엔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이 지상에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새로운 국정세력은 ‘창조적 파괴’를 상기시킬 만큼 이미 많은 것을 없애고 또 새로 만들기로 약속했다. 만들기로 약속한 대표적인 것이 실용 지향 정부다. 기존의 비대 정부를 ‘슬림화’하여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만드는 작업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반듯하고 올바른 시대정신을 만드는 일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새로운 시대정신이라면, 단연 높은 데서 ‘국민을 질타하던 리더십’을 ‘국민을 섬기는 리더십’으로 바꾸는 일이다. 우리는 얼마 전 그 말을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입으로부터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오매불망(寤寐不忘) 얼마나 듣고 싶어했던 말인가. 온 국민은 그 말에 너무나 굶주렸었다. 이제 문제는 말이 아니라 실천이다. 이 ‘섬기는 리더십’의 시대정신을 구현하려면, 무엇보다 국정 주도세력이 겸손해야 한다. 언제부턴가 국민은 노무현 정부에 대해 국리민복(國利民福)의 역할을 기대하기는커녕, 정부의 존재 그 자체를 견뎌 왔다. 386 집권세력의 무능과 오만, 아마추어리즘은 물론, 심지어 대통령이 국민 앞에 대놓고 자신의 불만을 표출하고 짜증을 내어도 참고 또 참았던 것이다. 노 정부가 이처럼 까칠하고 교만한 리더십이 된 것은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선출된 권력’이라는 알량한 자부심 때문이었다. 투정을 부리는 리더십이었기에 개혁만 외치면 될 줄 알았지, 거친 언사를 할 때마다 국민의 상처에 소금을 뿌린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정치란 아무리 선정(善政)을 표방해도 악이 나오고 고통이 수반되게 마련이다. 오죽 하면 막스 베버가 정치를 ‘악마와의 계약’이라고 했을까. 오진하는 의사의 경우처럼, 좋은 의도를 가져도 사고가 터지고 좋은 정책을 펴도 고통을 받는 사람이 나오는 것이 국정의 속성이다. 따라서 최선을 다해도 뜻하지 않은 고통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항상 국민 앞에 미안해하며 용서를 구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테베에서 선정을 폈던 오이디푸스도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같이 산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눈을 찌르고 참회의 길을 떠나지 않았던가. 국정 지도자는 자신의 눈을 찌를 필요까지는 없으나, 자신의 정책에서 언제나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나온다는 사실에 옷깃을 여미고 신 앞의 백일기도나 부처 앞에 3000배 올리는 심정으로 정치에 임해야 한다. ‘섬기는 리더십’은 일하는 리더십으로 나타나는 법이다. 섬기는 리더십은 ‘머슴의 리더십’이기에 국민을 위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다는 결의로 충만해야 한다. 일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하는 것이다. 정부부터 전국 석차 10000등 안에 드는 사람이 아니라 10등 안에 드는 최고의 인재들을 골라 써야 한다. 능력없이 지연이나 학연으로 국정에 참여하는 사람은 국민보다 대통령을 섬기려는 성향이 강한 데 비해 인연없이 능력만으로 국정에 참여하는 사람은 대통령보다 국민을 섬기려는 경향이 강한 법이다. 능력 있는 사람들만을 발탁해서 쓰면, 국민은 보혁이나 여야, 지역을 떠나 “실용주의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수긍하면서 받아들일 것이다. 사람을 쓰는데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는 데만 혈안이 되고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국정은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또 ‘섬기는 리더십’은 통합적 리더십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려면 밤에 먹이를 구하러 나서는 야행성 살쾡이처럼 귀가 밝고 눈이 밝은 대신, 자물쇠처럼 입이 무거워야 한다. 통합이란 사람을 껴안는 것이다. 문제는 한두 사람은 껴안을 수 있으나, 모든 국민을 껴안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국민 모두를 껴안기 위해서는 지지자들로부터 나오는 ‘용비어천가’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비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노 정부의 비극은 언론으로부터의 비판을 자신을 흔들려는 보수의 음모로 보았다는 데 있다. 그 결과 언제나 분노에 차 있고 회한을 토로하는 리더십이 됐다. 물론 비판 가운데는 비판을 위한 비판도 있다. 그러나 그런 비판이라도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한 대로 ‘악마의 대변자역’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국민의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섬기는 리더십’은 하류 지향이 아닌 상류 지향형이다. 상류 지향의 리더십이라면, 아래로만 향하던 흐름을 멈추고 위로 향하는 흐름을 만드는 것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그러나 국가나 사회는 하류를 지향해서는 안 되며, 연어처럼 아래로 흐르는 강물을 역류하여 상류를 지향해야 한다. 당연히 밑으로 흐르던 것을 위로 바꾸려면 시시포스가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면서 들었던 만큼의 힘이 들 것이나, 국정의 상류 지향은 ‘선택’이 아니라 ‘당위’이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을 나누어야 한다는, 이른바 ‘분배 중심’은 노 정부의 국정철학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약자 중심으로 눈높이를 맞추는 그런 정책은 사회의 하향 평준화를 초래했다. 수많은 자동차가 질주하는 도로에서 다른 모든 차선은 막아놓고 1차로로만 다니게 했으니, 교통 체증은 어느 때보다 심해졌고 모든 운전자가 짜증을 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징벌적인 중과세 위주의 부동산정책과 평준화 위주의 교육정책이다. 이 약자 위주 사고(思考)의 문제는 집 없는 사람과 점심을 굶는 학생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능력과 가능성, 자질 등 다양한 범주의 사람이 존재하고 있는 사회 현실에 눈을 감았다는 데 있다. 아래로 흐르던 사회의 물줄기를 상류 지향으로 바꾸려면 모든 차선을 열어 놓아 자신의 능력과 속도대로 길을 다니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상류를 지향하는 정부라면, 1류를 없애고 3류나 4류를 키우는 데 중점을 두기보다는 3류는 2류로, 2류는 1류로, 1류는 초일류로 만드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국정세력이 겸손한 프로 정신으로 무장하고 상류를 지향할 때, 국민이 애타게 바라던 리더십, 즉 국민의 발을 씻기는 ‘세족(洗足)의 리더십’이 된다. 5년 후 새 정부는 국민으로부터 “5년 전에 비해 국민의 삶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들었는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그때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섬기는 리더십’은 성공한 것이다. 그러려면 일부 지지자들의 환호와 탄성, 호산나에 넋을 팔지 말고 항상 깨어 있고 주위를 살펴야 한다. 우리는 새로운 리더십이 꼭 성공하기를 빈다. 그것은 단순히 보수의 운명이 아니라 이 나라의 운명을 가늠하는 것이기에…. 박효종 (서울대 교수·정치학 / 바른사회 공동대표) 출처 - 문화일보 2008. 1. 1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