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도 될 말' 과 '해선 안될 말' - 박효종
	2007-10-04
'해도 될 말' 과 '해선 안될 말' 어제 두 장의 사진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똑같이 남측 대표단의 일원인데, 한 사람은 김정일 국방위원장하고 두 손으로 악수를 하면서 고개를 숙였고 또 한 사람은 꼿꼿이 서서 한 손으로 악수를 했다. 이 대비되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같은 공손함이지만 한 사람의 고개 숙임에서 비굴함이 묻어났다면 다른 사람의 꼿꼿함에서 당당함이 돋보였던 것이다. 평양에서 이틀 밤을 보낸 노무현 대통령은 어떤 모습으로 평가받을 것인가. 우리는 이번 만남을 레임덕 대통령과 예측 불가한 지도자의 만남이라든지, 임기가 5달 남은 대통령과 핵위기 장본인의 만남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또 처음에는 시무룩한 표정이었다가 한층 밝아진 김 위원장의 모습 변화에도 흥미가 없고 2000년의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과 비교해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느냐의 논란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한편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지난 대통령을 두고 백범 김구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간 모습으로 포장하는 것도 필요 이상의 호들갑을 떠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하루 더 머물러 달라”는 김 위원장의 전격 제안에도 흥분할 필요가 없다. 그의 깜짝 연출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런 이벤트성 사건에 관심을 갖는 것이 호사가의 일이라면 이번의 만남에는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결정해야 할 것도 있는가 하면 결정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고, 합의해야 할 것이 있는가 하면 합의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으며, 줄 것도 있지만 주지 말아야 할 것도 있는 것이 바로 이 회담이다. 이번 만남이 성공하려면 유연성도 필요하고 실용주의도, 임기응변도 중요하다. 때로는 간도 빼주고 쓸개도 빼주어야 할 때가 있을는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덕담 어린 건배사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칙이 중요하고 또 그 원칙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할 때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원칙을 내세우는 것은 교조주의의 한 형태겠지만, 힘들고 절실한 시점에서 원칙을 고수하면 ‘용기 있는 원칙주의자’가 된다. 노 대통령은 만수대의사당을 방문한 자리에서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 주권의 전당’이라고 방명록에 썼다. 이것은 오래 전 강 아무개 교수가 평양을 방문한 자리에서 “만경대 정신을 본받자”고 한 표현과 비교할 수는 없겠으나, 문명사적 흐름에 둔감한 표현이며 문명과 야만, 민주와 반민주, 인권과 반인권의 차이에 대한 감수성이 약한 표현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평화 공존의 차원에서 한 체제를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과대 칭송하는 것은 다르다. 회담의 성공을 위하여 ‘간과 쓸개’는 내줄 수 있겠으나 ‘영혼’을 내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희곡 속의 파우스트는 젊음을 위해 영혼을 팔았다고 하지만 한반도의 우리는 평화를 위해서라도 영혼을 팔 수는 없다. 노 대통령은 평양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이번 회담에서 “금기를 두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안될 말이다. 원칙과 금기는 있어야 한다. 무엇이 건강한 체제고 무엇이 행복이며 무엇이 주권인지에 대한 명확한 문명사적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것 없이 몰가치적으로 ‘민족’이라는 이름 앞에 다른 모든 가치들을 창백하게 만드는 일은 곤란하다. 임기가 5개월 남은 대통령도 우리를 대변하는 대통령일진대 대한민국이 소중하게 가꾸어온 가치들을 용기 있게 대변하는 역할에서 한시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이제 이번 회담 평가의 기준은 ‘평양에서 파격적 환대를 받았느냐’, ‘말잔치가 얼마나 풍성했느냐’가 아니라 ‘말할 것은 말하지 않고 안 할 말만 했느냐’ 혹은 ‘합의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합의하고 합의해야 할 것은 합의를 못했느냐’가 될 것이다. 과연 노 대통령은 민족과 역사 앞에서 ‘영원히’ 얼굴을 붉히는 것보다는 김 위원장 앞에서 ‘잠시’ 얼굴을 붉히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을까. 박효종 (서울대 교수·윤리교육 / 바른사회 공동대표) 출처 - 조선일보 2007. 10. 4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