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기만 하면 된다? - 이영조
	2002-11-19
이기기만 하면 된다? 필자가 아주 싫어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이다. 이 말에는 절차와 수단이야 어찌 되었든 결과와 목적만 좋으면 괜찮다는 결과중심적 사고가 담겨 있다. 우리 사회의 많은 병폐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러한 결과지상주의가 빚어낸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른 한편에서 절차에 대한 무시는 결과에 대한 부정으로도 이어진다. 규칙도 없고 심판도 없는 아수라장이니 결과에 쉽사리 승복하지도 않는다. 선거에서 이기면 부정선거로 이긴 것으로 여겨지고 돈을 벌면 부정한 방법으로 번 것으로 치부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를 바로잡고 이끌 권위가 설 수가 없다. 민주주의도 제대로 자리잡기 어렵다. 왜냐하면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우스 루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민주주의는 확정되지 않은 결과에 대한 동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절차만 정당하면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란 의미이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에도 우리의 정치권은 결과지상주의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제 손으로 뽑은 후보도 내치는가 하면 적과의 동침도 서슴지 않는 것이 작금의 정치현실이다. 지금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는 민주당과 국민통합21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 합의도 결과지상주의의 또 다른 산물인 것 같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노무현·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시도는 절차적으로 문제가 많다. 무엇보다도 정당의 정해진 후보 선출 절차를 희화화함으로써 정당의 존재가치를 부정하고 있다. 노무현 후보의 경우 자신을 후보로 선출한 국민경선의 결과를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일각에서 증언하듯이 국민경선이 거대한 사기극이 아닌 다음에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몽준 후보의 경우 창당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이렇게 여론조사에 자신을 내맡길 바에야 왜 당은 만들고 왜 후보로 나섰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노무현·정몽준 단일화가 1997년의 DJP(김대중·김종필)연합과 너무나도 닮은꼴이라는 데 아연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선거만을 염두에 둔 이질적 세력 사이의 ‘정략결혼’이 어떤 파국적인 결과를 낳게 되는지 DJP연합에서 지난 5년간 뼈저리게 경험했다. 노·정 연합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만에 하나라도 집권에 성공할 경우 이념은 혼란에 빠지고 국정은 표류하는 사태가 일어날 우려가 없지 않다. 5년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그래도 그럴 듯한 명분이 있었다는 점이다. 오로지 정권 획득을 위한 야합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DJP연합이지만 지역등권론이나 수평적 정권교체와 같은 명분을 표방함으로써 어느 정도 국민적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노무현·정몽준 연합은 그런 명분도 없다. 무언가 있다면 그것은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당선을 저지하겠다는 공통의 목표뿐이다. 사실 이념이나 정강정책 등이 유사한 후보와 정당 단일화의 시도 자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는 살아온 길이나 이념과 성향, 그리고 지향점이 판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분도 절차도 무시하고 단일화로 나서는 것은 순전히 눈먼 권력욕의 발로로 비칠 수 있다. 오로지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아 현 정권을 ‘사실상 유지’하면서 그 과실을 나누어 차지하겠다는 계산이 아니라면 어떻게 전혀 딴판인 두 사람이 같은 배를 타려 하고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노 후보와 정 후보는 구태정치를 청산하겠다는 다짐으로 명분에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DJP의 구태정치를 재현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구태정치를 청산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게다가 국회를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여소야대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과거와 같이 의원 빼가기에 매달릴 것이 뻔하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영조 (경희대 정치학 교수 / 시민회의 사무총장) 출처 - 조선일보 2002. 11. 19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