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기업 처리의 교훈 - 정갑영
	2002-11-18
부실기업 처리의 교훈 12월이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지 5년이 된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위기는 극복했지만 그동안 우리가 부담한 경제.사회적 비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당시 30대 재벌 중 현재까지 절반 이상이 사라졌거나 채권단의 관리상태에 있고 쓰러진 중소기업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 절망적인 위기와 반전, 기업 흥망의 처절한 드라마가 도처에 깔려 있다. 물론 선진화를 위한 제도개혁도 많았고 국민의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도 크게 향상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1백56조원에 달하는 공적자금과 거대 부실기업이 부담스러운 유산으로 남아있다. 특히 공적자금 투입으로 국유화된 금융기관의 매각과 부실기업의 정리는 우리 경제의 미래를 좌우할 중요한 현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효율적인 매각을 통해 경제의 선진화에 기여할 수도 있고 반대로 과거의 관행을 되풀이하며 사회적 비용만 증가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5년간의 부실처리 과정을 살펴보면 전자보다는 후자에 대한 우려가 훨씬 더 크다. 아직도 부실기업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모델을 정착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치인과 근로자는 물론 여론을 주도하는 일부 계층마저도 부실처리의 사회적 비용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표밭이나 집단 이기주의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왜곡된 주장을 펼치는 것인가. 최근 조흥은행의 매각과 관련된 논란을 보면 그런 우려를 떨쳐버릴 수 없다. 과거에도 정부지분의 매각이나 합병, 민영화에 대한 반대는 항상 부실을 자초한 내부조직에서부터 비롯됐다. 국부 유출은 물론 고용불안을 야기하거나 산업기반을 와해시키며 특정기업에 특혜를 주는 헐값 매각이라고 주장한다. 아니면 일정기간 내에 회생할 수 있다고 미래의 잠재력을 호소한다. 결국 총파업이 단행되고 정치권은 합세해 국유화를 지지하거나 국민기업으로의 육성을 내세운다. 물론 이 논리대로 정상화될 수 있다면 얼마나 바람직하겠는가. 그러나 이런 행태의 답습은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모두 실패로 얼룩져 있다. 대우차 처리과정을 보자. 70억달러 이상을 제시받은 1차 입찰이 헐값 매각반대에 부닥쳐 무산되고 법정관리 2년 후에 겨우 20억달러를 받고 팔았다. 그 기간 중 신규로 수혈된 공적자금만도 1조7천억원에 달했으니 얼마나 손실이 컸는가. 조기에 제대로 매각했다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이것은 결코 특정기업에 한정된 현상이 아니다. 기아차와 하이닉스. 대한생명.한보철강 등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기업 가치는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상승하는 것이 아니다. 한 번 부실화된 기업의 시장가치는 오히려 포물선의 하향곡선처럼 빠른 속도로 떨어지기 쉽다. 좋은 인재가 빠져나가고, 투자자가 외면하며, 소비자의 신뢰를 잃고, 돈을 빌려준 채권자마저도 조기에 회수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악화(惡貨)만 남고 양화(良貨)는 떠나는 그레샴의 법칙이 작동한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금융기관이라고 이 법칙의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부실화 한 종금사들도 그러했고, 주인 없이 표류하는 대우증권에서 금융사고가 빈발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어떻게 이런 악순환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모멘텀을 만들어 패러다임을 바꾸는 획기적인 구조개혁이 필요하다. 과연 기존체제로 이런 변혁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금융기관의 정부지분 매각이 절실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기본적으로 은행 경영은 정부의 본업이 아니다. 매각을 미룬다고 주가가 오른다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기다리는 기회비용이 증가할 가능성만 커질 따름이다. 정부지분을 정리해 경영성과를 개선시킬 수 있다면 당연히 매각을 서둘러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공적자금을 회수할 수준이라면 당연히 정부지분을 매각하고 '국유은행'의 불명예를 벗겨줘야 한다. 그래서 부실의 유산을 떨쳐버리고 순수한 민간은행으로 다시 탄생시켜야 한다. 만약 정치논리에 휘말려 과거와 같은 매각 지연이 되풀이 된다면 경쟁력은 낙후되고 미래의 사회적 비용만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정갑영 (연세대 경제학 교수 / 시민회의 회원) 출처 - 중앙일보 2002. 11. 18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