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더기 된 `경제특구법안` - 류동길
	2002-11-12
누더기 된 `경제특구법안` 경제특구법안의 처리과정을 보면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린다거나 ‘경제는 정치인이 잠자는 밤에 성장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이 법안이 당초 취지에 크게 벗어나는 모양새가 되더니 그것도 노동계의 반발에 밀려 지난 8일 국회 본회의 처리 직전에 통과가 좌절됐다. 국회는 정치개혁법 처리를 위해 소집한 14일 본회의 이전까지 수정안을 마련, 통과시킬 예정이라고 하지만 전망은 불투명하다. 이미 누더기가 돼버린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 법안을 만든 정부의 당초 구상은 한국을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국제공항·항만 등의 기반시설을 갖춘 지역을 특구로 지정, 외국인 투자 기업에 근로기준법 일부 조항의 적용을 배제하고 세제·의료·교육 등의 특혜를 부여하여 외국인 투자기업을 유치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법안은 정부 부처간 논의과정에서 노동법 적용이 당초보다 강화되고 외국 교육기관 설립도 어려워졌다. 국회 재경위에서 이 법을 다루면서 ‘경제자유구역법’으로 이름을 바꾸고 경제자유구역 지정요건을 완화, 사실상 전국 어디든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될 수 있도록 했다. 법안을 심의했던 국회의원들이 자기들 출신 지역을 특구에 편입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다. 경제문제를 정치적으로 접근한 현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기업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려면 누구나 지적해 왔듯이 정부의 규제를 과감히 없애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여야 한다. 일부 지역에 파격적 특혜를 부여하면 국내 기업에 대한 ‘역차별’이 우려된다는 비판론도 있다. 그래서 특정 지역보다 한국 전체가 매력적인 투자대상 지역이어야 한다는, 다시 말해 전국을 경제특구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이게 쉬운 일이 아니라서 우선 외국인 투자기업을 유치하기 위한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려는 것이 경제특구 구상이었다. 외국인 투자기업은 한국의 사정을 생각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기업하기에 좋다고 생각하면 그들은 온다. 우리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외국 자본을 유치하고 있는 곳이 있다면 경쟁력 있는 우수한 외국 기업이 한국행을 고집할 이유가 있을까. 기업은 어떤 지역이든 매력이 있으면 오지 말라고 해도 온다. 유력한 국회의원의 지역구라고 찾아올 리는 만무하다. 전경련이 주한 외국 기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 경제특구의 종합경쟁력은 특구로 자리잡았거나 특구식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동아시아 5개 국가(지역) 중 탄정(말레이시아)보다 앞섰을 뿐 싱가포르, 홍콩, 상하이에 크게 못 미치는 4위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는 세계의 움직임을 몰라도 너무 모르면서 우리의 시각으로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나라 안에서 대선을 앞두고 사생 결단의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나라 밖 지구의 시계바늘은 잠시도 쉬지 않고 빨리 돌아가고 있다. 우리가 말로만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를 부르짖고 있는 사이에 아세안 주변의 일본, 중국, 인도 등이 아세안과 자유무역협정을 맺겠다고 하고 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노리고 있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무역대국임을 내세우면서도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의 물꼬를 겨우 트는 단계에 와 있는 게 고작일 뿐 이런 일에 처지고 있다. 외자 유치를 위해 경쟁을 벌이는 각국 경제특구의 공통점은 안정된 노사관계다. 홍콩, 싱가포르, 대만, 상하이, 아일랜드, 스웨덴, 네덜란드 등지에서 노사문제는 더 이상 사회문제가 아니다. 한국은 외국기업의 입장에서 볼 때 매력이 거의 없어지는 나라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축구가 월드컵 4강에 오른 건 감독과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였고, 위기 때 승부수를 던진 결과다. 한국경제는 위기 상황에 있는데 위기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그렇다면 위기 탈출은 불가능한 게 아닌가. 헛된 꿈에서 깨어나, 노사관계에서 보듯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 규제 혁파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가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직전 상태로 회귀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류동길 (숭실대 경제학 교수 / 시민회의 회원) 출처 - 문화일보 2002. 11. 11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