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학 후 8주' - 함인희
	2007-04-27
'대학 입학 후 8주' 고등교육 관련 전문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대학 입학 후 8주 동안’이야말로 향후 50여 년에 이르는 성인기 삶의 밑그림이 그려지는 매우 의미심장한 시기라고 한다. 이 시기에, 나는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에 대한 탐색이 이루어지고, 내가 진정 원하는 건 무엇이며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윤곽을 그리는 작업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서서히 자신감의 기반을 다져나가고 자존감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3월 대학 입학 후 오늘로서 꼭 8주를 보내게 되는 우리네 신입생들은 어떤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입시경쟁 속 ‘꿈’ 잃은 아이들 대학 입학 후 8주가 인생을 결정한다는 주장은 입시 경쟁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유럽과 미국의 경험에 터하고 있는 만큼, 우리네 상황에 직접 적용하기에는 적잖은 무리가 따를 것이다. 그럼에도 대학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상징적 메시지로는 이보다 더욱 효과적 표현은 없으리란 생각이다. GNP 대비 교육비 지출율은 OECD 국가 중 1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대학 경쟁력 수준은 세계 유수의 대학과 큰 격차를 보이는 상황이고 보니, 소위 일류대학 진입에 성공한 학생일수록 “내가 겨우 이곳에 들어오려고 그토록 고생 했나”하는 자괴감에 빠져 한동안 방황을 거듭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일류대학 신입생 3명 가운데 1명은 대학에 들어온 이후 심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고, 이른바 ‘반수’(半修) 및 편입을 목표로 삼는 대학생 숫자가 날로 늘어간다는 소식도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몇 해 전 <뉴스위크>지는 ‘섬뜩한 아이들’(Gruesome Children)이란 제목으로 입시 경쟁에 시달리는 대한민국 일본 대만 등지의 중 고등학생을 특집기사로 다룬 적이 있다. 당시 기사는 입시 전쟁 속에서 누구를 향한 건지 분명치 않으나 가슴 가득 끓어오르는 분노를 안고 불평과 불만, 그리고 불안에 허덕이는 우리 자녀들 모습을 생생하게 담은 기억이 난다. 특별히 ‘4당5락’(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 원칙에 짜 맞춘 한국의 고3 수험생의 하루 일과표를 소개하는 박스기사에는 ‘믿거나 말거나’란 소제목이 붙기도 했다. 그토록 멀고 험한 길을 달려오는 동안 “지쳐버린 아이들”은 대학생활 연륜을 쌓아가면서 자신의 꿈을 포기하기 시작한다. 실은 자신의 진정한 꿈이 무언지 생각해볼 기회를 가져본 적 없는 우리 아이들은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언지 잘 알지 못한다. 공부를 잘한다 싶으면 십중팔구 의사 변호사의 꿈을 꾸거나 사법 행정 외무고시에 도전하고, 어학에 취미가 있다 싶으면 동시통역사 아니면 외국계 기업이나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다고 이야기 한다. 부모와 주변의 기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사육된 아이들”은 그 기대에 부응하여 의사 변호사가 되겠다고 꿈꾸지만 정작 ‘어떤 의사’ 혹은 ‘어떤 변호사’가 될 건지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경우가 다반사다. ●인생 밑그림 마음껏 그리게 하지만, 대학 입학과 더불어 다시 뛰는 마라톤이 시작된다는 사실, 그 전까지의 성적은 일단 무효로 하고 새로운 장기전에 돌입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아이들이 대학 입학 후 8주 동안 탄탄한 밑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저마다 다종다양의 재능과 잠재력을 타고 났음을 일깨워주고, “한번 뿐인 인생, 네가 원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려 보라”고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며, 꿈이란 포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지기 위해 기다리는 것임을 가슴 깊이 새기도록 해주었으면 한다. 우리네 특유의 교육열이 긍정적 자산이요 소중한 미덕이라면, 자녀를 향한 부모의 격려와 독려, 사회적 투자와 헌신은 바로 대학 교육에서부터 시작되어야 마땅하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 바른사회 정책위원) 출처 - 한국일보 2007. 4. 27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