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대통령 ‘굴복의 미학’을 생각한다 - 박효종
	2006-11-29
盧대통령 ‘굴복의 미학’을 생각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 같다. 여당의 8.8% 지지율을 의식하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일찍이 금의환향(錦衣還鄕)한 한나라의 유방처럼 ‘대풍가’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임기를 마치지 않은 첫 번째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은 예사로운 말이 아니다. 물론 이 말이 ‘전효숙카드’를 접은 다음의 허탈함과 격분을 표출한 것인지, 아니면 비상한 의지가 포함돼 있는지 알 수 없다. 또 만남을 거부한 열린우리당을 향한 불만 겸 경고인지, 그렇지 않으면 협상 테이블에 앉기를 거부한 한나라당에 대한 울분인지 알 수 없다. 아니면 보다 고도의 대통령직 배수진을 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대통령직 포기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이 발언에서 정치공학적 의미를 찾기보다 정치 도의나 공직윤리의 차원에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의 책무란 국태민안(國泰民安), 즉 국가를 태평하게 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다. 정치지도자가 국민을 불안하게 만든다면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한창 운항하고 있는 배의 선장이 그 직을 돌연 그만두겠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지금 이런 말을 쏟아내는 노 대통령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여당은 여당대로 화가 나 있고, 야당은 야당대로 냉소적이다. 그렇다고 노사모가 결사적으로 대통령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친노 매체들도 노 대통령 때문에 진보의 이미지만 구겼다고 불만이 대단하다. 대통령은 글자 그대로 ‘왕따’ 신세고 벼랑끝에 섰다. 왜 그렇게 됐을까. 노 대통령은 이제까지 ‘이기는 법’만 배웠을 뿐 ‘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대선후보가 될 때도, 탄핵 때도 그랬다.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며 승리의 귀재가 됐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노 대통령은 ‘승리의 신화’는 만들었을망정 ‘패배의 미학’을 배울 기회는 갖지 못했다. 지고 나서도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오뚝이처럼 일곱 번 넘어진 다음에도 여덟 번째는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는 것만 알았다. 그토록 많은 재·보궐 선거에서 졌는데도 진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5·31 지방선거의 참패에서도 진 것을 인정하기는커녕 “선거에 한두 번 진다고 나라가 망하는 것은 아니다”고 했을 뿐이다. 노 대통령은 당·정 분리라면서도 열린우리당을 이기려 했고, 한나라당은 수구정당이라서 이기려 했으며, 언론은 기득권 세력이라며 이기려 했고, 국민은 독재시대에 살고 있는 것처럼 산다며 이기려 했다. 또 강남 부자들은 부도덕하다며 이기려 했고, 시장은 실패하는 법이라며 이기려고 했다. 거기에 비극이 있었다. 유도를 배우는 사람은 ‘낙법(落法)’ 즉 떨어지는 법부터 배운다. 낙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아예 죽거나 중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은 지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지면 섭섭해하고, 비판 받으면 열패감을 느꼈고, 비난을 받으면 짜증을 냈다. ‘지는 것’의 미학, ‘씹히는 것’의 미학, ‘백기를 드는 것’의 미학을 몰랐던 것이다. 국민은 인사 문제에서 대통령에게 지라고 하는데, 왜 청와대는 “대통령에게 남은 것은 인사권밖에 없다”며 버티는가. 여론은 ‘읍참마속(泣斬馬謖)’처럼 오른팔이든 왼팔이든 잘라내라고 요구하는데, 왜 오른팔은 왼팔로, 왼팔은 오른팔로 바꾸며 ‘돌려막기’만 거듭하는가. 외톨이가 된 노 대통령의 비극은 이기려고만 했던 ‘승자의 비극’이다. 지금부터 여당에도 지고 야당에도 지며 언론이나 국민에게도 굴복하는 법을 배우라. 또 시장이나 강남 사람들에게도 지는 법을 배우라. 그러면 길이 열린다. 깨끗이 졌다고 승복하는 것은 결코 운동선수에게만 미덕이 아니다. 대통령에게도 굴복하는 것은 미덕이 될 수 있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정치학 / 바른사회 공동대표) 출처 - 문화일보 2006. 11. 29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