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좌추적 거부는 직무유기 - 제성호
	2002-10-05
계좌추적 거부는 직무유기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개최 직전 4억달러의 검은 돈이 현대상선을 통해 북한에 전달됐는가 여부를 둘러싼 의혹의 규명은 이제 전국민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헌법상 보장된 ‘알 권리’의 대상이 된 것이다.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정부가 수표추적과 계좌추적을 통해 금융거래 내용에 관한 정보와 자료를 조사함으로써 진상을 파악, 이를 제대로 알려주어야 한다. 즉 금융감독원장 등이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제4조 제1항 4의 라) ‘금융실명거래 위반과 부외거래·출자자 대출·동일인 한도초과 등 법령 위반행위의 조사에 필요한 경우’에 근거해 성실하게 계좌추적을 해야 한다. 산업은행이 빌려준 4000억원이 현대상선 장부에서 누락됐으므로 이는 ‘부외(off balance)거래’에 해당하며, 따라서 금감원이 이 조항에 의거해 얼마든지 계좌추적을 할 수 있다. 더구나 이 사건이 산업은행의 입장에서 보면 광의의 금융사고(빌려준 돈을 운영자금이 아닌 딴 데다 쓴 경우)에 해당되는 만큼, 역시 계좌추적을 할 수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 금감원은 당사자의 인권보호를 구실로 상기 규정에 의한 계좌추적을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금감원의 입장은 국민의 알권리를 외면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이번 사안을 단순히 금융거래 정보의 공개라는 문제로 그 본질을 희석시키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그간의 금감원 조사 관행에 비춰 볼 때 조사의 의지가 없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어 많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하고 있다. 정경유착을 비호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본질상 이번 사안은 국내법상 반국가단체로 규정돼 있는 북한과 모종의 불법적인 뒷거래가 있었는지 여부와 관련돼 있음을 알아야 한다. 현행법상 다방면의 남북교류와 대북지원은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에 명시된 절차에 따라 실시하도록 하고 있다. 각종의 대북 교류와 지원에서 이 법이 국가보안법상에 우선해 적용하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법체계 내에는 그 어디에도 대북 뒷거래에 관한 규정이 없다. 따라서 당국간 대화나 교류의 대가로 과다한 뒷돈을 건네주는 것은 명백히 실정법에 저촉되는 일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가 될 수도 있다. 혹자는 대북 뒷돈의 제공이 뇌물공여 ‘범죄’에 해당된다고까지 말한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4900억원의 사용처를 밝히는 것은 국기(國基)와 관련된 문제이며, 개인의 금융거래정보 보호를 이유로 회피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금감원이 계좌추적을 끝까지 거부할 경우 그것은 고의적인 직무유기가 되며, 야당이 제기하는 의혹을 묵시적으로 사실로 인정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정부가 이번 사안에 있어서 아무런 잘못이 없다면 금감원이 빠른 시일 내에 조사에 착수하도록 조치해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성사된 남북 당국간 대화와 교류 이면에 과다한 대북 뒷거래의 관행이 있었다면, 이번 4900억원의 사용처 공개를 계기로 그러한 불법적이고 부당한 뒷거래의 관행을 근절하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남북대화와 교류에 투입된 모든 자금의 투명성을 높이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대북정책이 도덕성과 정당성을 가질 수 있으며, 국민적 지지를 확보해 강력한 추동력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현 정부가 추진해 온 햇볕정책은 정책결정 및 추진과정에서 일반 국민들에게 가려진 그늘이 너무 많았다. 이제부터라도 햇볕정책 자체에 햇볕이 들도록 해야 할 것이다. 諸成鎬 (중앙대 법학과 교수 / 시민회의 회원) 출처 - 조선일보 2002. 10. 5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