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는 일, 안되는 일 없는 나라들 - 유석춘
	2002-08-29
되는 일, 안되는 일 없는 나라들 많은 한국인에게 필리핀은 수수께끼와 같은 나라다. 특별한 관심 없이 우연한 계기로 관광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필리핀은 자연이 아름답고 물가가 싸며 외국인에게 친절한 지상의 낙원과 같은 국가로 기억되기도 한다. 다른 한편 시민운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필리핀은 민중혁명을 통해 부패하고 권위적인 정권을 두 번이나 무너뜨린 아시아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인식되기도 한다. 나아가서 남녀평등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필리핀은 최근 15년 사이에 여성 대통령을 두 번이나 배출한 세계적인 선진국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잘 다듬어진 휴양시설을 즐기기 위해 여기 저기를 이동하며 마주치는 도시와 농촌의 처참한 빈민들 모습은 관광객으로 하여금 필리핀이 그저 아름답고 친절한 지상의 낙원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마찬가지로 두 번의 민중혁명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시민사회가 여전히 고질적인 부패(cronyism)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필리핀의 민주주의를 회의하게 된다. 또한 두 명의 여성 대통령이 모두 필리핀의 내로라 하는 집안을 배경으로, 한 사람은 남편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아버지의 후광을 통해 대통령이 된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필리핀을 변화가 없는 영원한 ‘친족정치’의 나라라고 규정한 학자들의 견해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무역이나 투자와 같이 장기적인 활동을 하며 필리핀 사회의 구석구석을 겪어 본 사람들에게 필리핀은 그야말로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수수께끼와 같은 나라라는 평가를 얻게 된다. 특히 중앙 정부의 기획과 집행이 일사불란하게 지방으로 침투하는 상황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선거 결과의 집계에만 석 달이 소요되는 필리핀의 상황은 정말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다. 또한 해안을 따라 침투한 간첩이나 산 속에 숨은 공비를 토벌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며칠이면 족한 우리에게 회교반군이나 공산반군의 준동이 수십 년씩이나 계속되는 일도 마찬가지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그렇다면 필리핀 사람들의 입장에서 한국은 어떤 나라로 인식되고 있을까. 필리핀 사람들에게 한국은 사계절이 뚜렷해 겨울이면 신기한 눈이 내리는 아름다운 나라일 수 있다. 또한 전쟁의 페허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연이어 이룩한 ‘아시아의 다음 거인’임에 틀림없을 수도 있다. 나아가서 노벨 평화상에 빛나는 인권 대통령이 굶주린 북한의 동포를 위해 인도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햇볕’과 같은 나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들어가 한국의 현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 아마도 필리핀 사람들 역시 한국을 수수께끼의 나라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왜 ‘아시아의 다음 거인’이라고 불리는 국민들의 점심 식사를 단 15분 만에 해치우며 또 왜 주당 노동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길어야만 하는지 필리핀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민주화 운동에 평생을 바쳐 국민의 지도자로 떠오른 분들이 왜 대통령이 되어서는 국민의 뜻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정치를 밀고 나가 결국은 아들들마저 감옥으로 보내는지도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납치의 왕국’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미군까지 끌어들인 토벌의 결과가 납치된 사람의 ‘토막난 목’이나 찾아낼 뿐인 필리핀의 경우나 전국민이 참여하여 집권정당의 대통령 후보를 결정한 선택을 여론조사 결과를 핑계로 하루아침에 뒤집으려는 공작이 난무하는 한국의 경우나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수수께끼의 나라이긴 매 한가지다. 유석춘 (연세대 사회학 교수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조선일보 2002. 8. 29 아침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