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쟁 말릴 `어머니` 없는가 - 이달곤
	2002-08-26
정쟁 말릴 `어머니` 없는가 지난 금요일은 처서(處暑)였다. 우리 옛말에 처서에 비가 오면 뒤주의 쌀도 줄어든다고 했다. 올해도 비가 왔으니 정말 흉년이 들 것인가? 농업의 비중이 줄어든 시대에 흉년이 무슨 대수일 것인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올해 흉년은 ‘정치흉년’까지 겹칠 가능성이 짙어 보이니 문제가 크다. 벌써 몇 달째인가? 지루한 정쟁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무슨 풍이 든 나라도 아닌데 온갖 풍을 몰고 다니는 이 정쟁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대권 때문이다. 모든 것을 대권 장악으로 연결시킨다.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는다. 소위 ‘병풍’을 몰고 가는 쪽이나 막는 쪽도 대권 쟁취에 이 문제를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상의 문제를 떠나서 힘겨루기로 판가름날 판이다. 국민은 수많은 게이트와 청문회도 실체적 진실보다는 정치의 힘겨루기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 사회적 혼란 속에서 대선이 치러질 가능성이 높고 이것을 정치불안으로 연결될 조짐이 보인다. 둘째, 정치보복 때문이다. 대권에서 질 듯싶은 쪽은 정치보복이 두렵다. 현재의 갈등구조에서는 과거 정치보복의 수준을 능가하는 보복이 있을 것이라고 대부분의 당사자들이 믿고 있는 것 같다. 이미 수많은 과오를 범했기에 되돌아가기 어려운 상황이다. 셋째, 국민에게 피로를 넘어서 우울증을 유발하고 있다. 택시를 한번 타 보라. 싸잡아 욕하지 않는 기사가 없다. 싫증이 오래가면 우울증이 된다. 6·29서해교전 이후 수해를 비롯한 민생문제는 물론이고, 대기하고 있는 법안들은 정치의 도움 없이는 해결되지 않는다. 네거티브 정쟁으로 일관하는 정치는 결국 국민 우울증의 근인이 될 것이다. 넷째, 정치권이 시간관리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집권 측도, 한나라당 측도 마찬가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정권 말기에, 결실에 마음을 두지 않고, 또다른 판을 펼치려 하는 것을 국민이 과연 수긍할 것인가? 정치는 시간의 예술이라고 한다. 제2공화국이 군사정권에 무너진 것도, 남미나 일부 남유럽 국가들의 후퇴도 모두 시간관리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다. 김정일까지 시간을 의식하고 있는 판에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 싸움이 지속될 때 이를 완화하거나 시간적으로 중지시키는 방안은 두 가지다. 하나는 어느 일방이 큰마음으로 양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가 나서는 방법이다. 그러면 누가 먼저 나설 것인가? 어느 쪽이든 먼저 조금이라도 양보하면 국민은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이러한 사생 결단의 상황에서 양보하는 데는 기술이 필요하다. 뭔가 통 큰 사람이 양보하되 그 양보가 상징적이면 더욱 좋고, 손익이 달린 실질적 문제라면 서로 조금씩 양보해야 한다. 상징적으로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거나 조금 양보하면 단방에 죽지 않는다는 안전감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국민이 고대하는 ‘화답하는 정치기술’을 발휘할 기반이 마련될 수 있다. 이 점에서 정치 지도자들의 결단이 요구된다. 큰 결단만이 국민의 정치우울증을 치유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어머니를 찾아야 한다. 이 사회의 원로들이 지난 입추쯤에는 나섰어야 했다. 그리고 언론도 과장보도로 부추기지 말고 사회의 공기(公器)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정쟁에 가담하고 있는 정치인들이 수에는 뛰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화해의 수까지 가르쳐줄 필요는 없어 보인다. 원로들이 나서고, 언론이 그들의 충정을 바로 전달하고, 국민이 따르면 엄청난 압력으로 작용하여 쟁투는 약간 수그러질 것이 아닌가. 나무랄 수도 있고 달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시간을 놓쳐서는 안 될 듯싶다. 장기적 관점에서는 정치보복을 중지하고 대권의 위력을 약화시키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야 한다. 보복은 회고적 정치를 낳고, 회고적 정치는 사회 전분야를 정지시킨다. 정치지도자의 사회적 약속을 기대한다. 또한 법적 장치를 마련하여야 한다.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하고 국민과 언론이 정치사회 문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제어해 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을 고안해 나가야 할 때이다. ‘정치지도자의 결단’으로 정치피로에서 벗어나 결실을 보는 추석을 맞게 되길 기대한다. 이달곤 (서울대 정책학 교수 / 시민회의 회원) 출처 - 문화일보 2002. 8. 26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