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쿼터, 넓게 멀리 보자 - 최병일
	2006-01-25
스크린쿼터, 넓게 멀리 보자 2005년도 프랑스 최고의 영화상인 세자르상 후보에 올랐던 영화 '오래된 약속'(한국에는 Long Engagement로 소개됨)은 프랑스 영화계에 거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2001년 프랑스 최고의 흥행작 '아밀리에'의 감독 장 피에르 주네와 주인공 오드리 토투가 호흡을 맞춘 이 영화의 국적시비 때문이었다.프랑스독립영화제작가협회는 '오래된 약속'이 미국의 워너브러더스가 제작했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의 보조금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들은 미국 자본의 저속한 상업주의를 프랑스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2004년 12월 프랑스 법원은 이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변치 않는 사랑의 위대함을 웅장한 서사시로 담아낸 '위대한 약속'은 감독 배우 제작진이 모두 프랑스인이었고 촬영지와 영화의 배경도 프랑스였으며,언어도 프랑스어였다. 세자르상에 외국영화 부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우수상에 지명됐다는 사실 자체가 프랑스 영화계 주류에서는 이 영화를 프랑스 영화로 간주하고 있다는 명백한 방증이었다. '외눈박이' 프랑스법원이 제작자본의 국적 추적에만 골몰해 이 영화에 '프랑스영화 아님'이라는 판정을 내렸지만 시장의 평가는 정반대였다. 이 영화는 그 해 프랑스에서 5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흥행 2위에 올랐다. 자본의 국적을 따져서 영화의 국적을 구분하는 제도는 한국에도 있다. 모든 상영관에서 1년의 40%(146일)는 한국영화를 의무 상영하도록 한 스크린쿼터가 그것이다. 1998년 한.미투자협정(BIT) 협상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지 8년이 지난 지금까지 논의에 아무런 진전이 없는(축소론자 입장에서 보면) 스크린쿼터가 또다시 쟁점이 되고 있다. 올 상반기 중 시작될 것으로 관측되는 한.미FTA협상 때문이다. 한.미 양국이 지지부진한 BIT협상 대신 FTA 추진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일단 환영할 만하다. 왜냐하면 FTA가 BIT까지 포함하는 더 포괄적인 자유무역형태이기 때문이다. 한.미 FTA가 성사되면 한국측의 관세인하 폭이 미국보다 훨씬 클 것이고,농업과 서비스시장이 거센 경쟁의 압력에 직면할 것이다. 미국으로부터의 수입과 투자는 급속히 늘어날 것이고,국제적으로 효율성이 취약한 분야는 실업과 구조조정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전반의 효율성이 향상되고 선진관행이 정착돼 중장기적으로는 한국경제에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 한.미FTA의 비용－효과 분석이다. 단기적인 고통과 장기적인 장밋빛을 맞바꾸는 것이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간단한 일은 분명 아닐 것이다. 더구나 지지도가 바닥에 떨어진 정권 후반기가 아닌가. 양극화 문제를 대선 쟁점화하려는 것이 정권의 정략이라면 한.미FTA는 결코 팔기 쉬운 약은 아닐 것이다. 그 한가운데에 스크린쿼터가 있다. 할리우드 대자본을 악으로 간주하고 공격하려는 세력에게 스크린쿼터는 정의로운 제도일지 모르지만,비판적 시각에서 보면 이는 정의를 가장한 편리한 이념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 자본은 미국 시스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황야의 카우보이'식 영화를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 반지의 제왕,매트릭스,슈렉,해리포터 등 최근의 블록버스터 영화 어디에도 절대적 선으로서의 미국은 없다. 할리우드 영화가 미국 가치의 선전도구라는 주장은 이제 공허한 이념공세일 뿐이다. 자본 기술은 미국의 편이란 등식은 더 이상 성립되지 않는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란 표현이 상징하듯이 자본과 기술이 세계시장을 무대로 연결되는 글로벌세계에서 블록버스터는 어디에도 가능하다. 최근 수년간 한국 영화의 비약적인 성장은 한국 영화가 스크린쿼터 속에 안주해야 한다는 논리의 설득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지난 8년 동안 영화계의 목소리에 눌려온 정부가 이제는 과단성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 / 시민회의 정책위원장) 출처 - 한국경제 2006. 1. 25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