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反민주주의를 강요하나 - 박효종
	2006-01-23
누가 反민주주의를 강요하나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교과서는 ‘바이블’처럼 불변의 진리로 다가간다. 학생들은 교과서이기 때문에 그냥 통째로 외우고 익힌다. 부모 들 중에도 교과서를 검증하자는 사람은 없다. 교과서니까 하고 믿는 마음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교과서는 과연 그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근현대사 교과서를 가지고 착실히 배운 학생이 해방 공간의 혼란한 상황에서 건국을 결단한 초대 대통령의 실체도 잘 모르고 있고, 대한민국 헌법의 윤곽조차 알고 있지 못하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반대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부자간 권력세습이 이뤄지고 세계의 지성들이 가혹한 반인권국가로 낙인찍고 있을 정도로 전체주의적 수령통치를 일삼아온 김일성과 김정일을 ‘우리식 사회주의’를 가꾸는 사람들로만 알고 있다면, 학생들의 인권 감수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 또, 강제 동원된 북한의 천리마운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 한국의 성공한 새마을운동은 폄훼하는 교과서라면, 학생들에게 아노미 현상이나 가치관 혼란을 야기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교육 현실이다. 20세기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면, 단연 1948년 8월15일의 건국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갖는 문명사적 의미는 분단국가의 결핍적 범주를 능가하는 것이다. 건국을 계기로 유교국가의 ‘조선인’이 근대의 ‘한국인’으로 바뀌었으며, 협력과 경쟁의 게임 규칙이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 및 시장질서를 규정하는 헌법의 규제 아래 놓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 집단의 한 부분으로 인식됐던 개인은 집단으로부터 독립된 인격적 존재로서 권리의 담지자가 됐다. 바로 이러한 변화가 비로소 대한민국 건국을 통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현대사 교과서들은 건국을 미군정과 일부 단정세력에 의한 집권 정도로 ‘에피소드화’하고 있고, 시대정신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는 산업화도 집권세력이 정권의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추진한 ‘왜곡된 산업화’ 정도로 평가절하하고 있다. 확실히 이러한 서술방식은 ‘외눈박이’ 서술이며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역사를 보는 데는 반성적 성찰이 있어야 하지만, 사실과 진실까지 왜곡할 정도의 자기학대는 곤란하다. 왜 교과서가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우리의 근현대사가 실패했다는 죄의식과 더불어 가치 혼란을 강요해야 할까. 경제에 관한 서술 역시 부실하다. 자라나는 세대들이 한국의 번영과 시장질서에 대해 올바른 의식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의 경제 발전이 담보될 수 있고 제2의 정주영이나 이병철같은 세계적 기업가들이 출현할 수 있는데, 시장행위나 기업활동 등을 고무하기는커녕, 반기업 정서를 부추기는 표현들이 부지기수다. 그것은 지금 한국이 누리는 번영이 어디서 온 것인지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다. 민주화에 대한 기술이 온통 각종 운동사로 점철돼 있는 것도 문제다. 산업현장에서 묵묵히 일해온 서민들의 일상적 노고를 경시한 채 저항적 운동만이 가치 있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 학생들은 어떤 가치관을 갖게 될 것인가. 이런 왜곡 서술들을 보면 교과서 저자들이 ‘플라톤의 동굴’ 안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교과서를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플라톤의 동굴’ 안에서 사람들은 쇠사슬에 발이 묶여 실체를 보지 못한 채 그림자만 본다. 왜 명백한 ‘사실’과 ‘진실’ 앞에 눈을 감는가. 사실 교과서가 편향됐다는 지적은 그동안 많이 나왔지만, 교과서들은 요지부동, 고쳐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게으른 지성’이거나 ‘편향된 고집불통의 지성’이다. 결국 교육인적자원부도 이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정치학 / 시민회의 공동대표) 출처 - 문화일보 2006. 1. 21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