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속없는 20년 규제개혁 - 김종석
2005-12-14
실속없는 20년 규제개혁 80년대 이후 역대 정부가 대를 이어 지금도 추진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개혁 정 책 중 하나가 바로 규제 개혁이다. 이제는 규제 개혁이 아예 법정 절차로 규정 돼 모든 신설ㆍ강화 규제는 행정부 안에서 사전 점검을 받도록 되어 있다. 소위 '시스템에 의한 개혁'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한국의 이 규제 개혁 시스템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나 세계은행과 같 은 국제기구에서 모범 사례로 선정돼 다른 나라에서 관심을 갖고 배워가기도 한다. 거의 20년 가까이 규제 개혁을 했고 선진국형 개혁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면 지 금쯤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되었어야 한 다. 그러나 현실은 아직도 대한민국의 기업 환경은 우리 경쟁국보다 못하고 식품안 전, 생활안전, 환경보호 같은 민생보호 수준은 아직 선진국에 못 미친다. 왜 그럴까. 국민이 느끼는 체감규제에 별 변화가 없는 것은 결코 홍보부족 때 문이 아니다. 규제에서 국민이 받는 부담은 밟아야 하는 절차나 제출해야 하는 서류의 수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의 규제라도 그 규제를 지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심적ㆍ물적 고통을 포함한 총체적 준수 부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절차가 복잡하고 기준이 모호해서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민원 결과는 집행자 의 임의적 판단에 달려 있다면 그것이 비록 한 개의 규제조항일지라도 규제를 받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될 수 있다. 최근 외국에서 한국의 규제 리스크가 높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또 어떤 규제들은 아예 국민들을 잠재적 범법자로 전제하고 만들어져 있다. 이런 규제들은 전형적으로 인허가 규제와 같은 사전통제를 통해 원칙금지, 허 용 예외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규정에 되는 일만 나열하고 규정에 없는 일은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형식이다. 출자총액 제한이나 공장입지 규제 같은 각종 행위 규제가 전형적인 사례다. 오랫동안 규제 개혁을 외쳐왔지만 국민들이 그 효과를 체감하지 못하는 것은 비록 숫자는 줄었지만 아직도 이런 불량 저질 규제가 남아 있고 또 계속 생기 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혁신 의지가 부족한 규제담당 공무원들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지만 동시에 무슨 일만 터지면 도대체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하면 서 무조건 조속히 대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정치권과 시민단체, 언론도 일 부 책임이 있다. 특히 국회의 입법만능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최근 신설된 불량 저질 규제 중 상당수가 의원입법에 근거하고 있다. 국회 차원의 규제품질관리가 절실하다. 학계에서는 규제 도입과 변화 과정을 공익 증진을 위한 과정이라기보다는 이익 집단의 이해조정 산물로 보고 있다. 규제를 집행하는 관료 조직도 하나의 이익 집단일 뿐이다. 중요하고 민감한 규제가 개혁 대상이 될 때마다 온갖 이익집단 이 들고 일어나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규제 개혁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규제의 울타리 속에 안주하고 있는 특혜와 이 권을 해소하고 그 이익을 대다수 보통사람에게 나누어 주자는 것이다. 갈등 조정과 사회 통합이 규제 개혁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목소리 큰 이익집단을 위해 분산된 보통사람들의 이익을 훼손하자는 것과 마찬가지다. 규제 개혁은 기업 이익을 위해 사회적 가치를 희생하자는 것이 아니다. 식품안 전이든 부동산 가격안정이든 비정규직 축소든 달성하는 방법이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시 통제 할당 적발 처벌이 아닌 방식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 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다양한 정책수단 개발을 위한 규제 개혁은 이제 규제공학이라고 불릴 정도로 첨단 과학화되고 있다. 이제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베트남조차도 규제 개 혁을 추진하고 있다. 규제 개혁은 이념 노선과 무관한 실용주의 과학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규제 개혁이 지지부진한 것은 규제 만능주의에 빠진 관료조직 의 이익과 자신들의 이익을 규제라는 공권력을 통해 지키려는 우리사회의 조직 화된 이익집단의 이익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우리나라의 고비용 저효율 핵심 덩어리 규제가 대부분 성역화되어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제대로 된 규제 개혁이야말로 정직하고 성실한 보통사람들이 손해 보지 않고, 우리 사회에 반칙과 특권을 해소하며, 부정부패를 줄이고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개혁 과제다. 김종석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매경경제 2005. 12. 14 테마진단